우아한 백조도 물밑선 세찬 발짓… “타고난 재능? 성실히 반복할뿐”[정신과 의사의 서재]

2023. 4. 2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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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하면 예쁜 드레스를 입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혼신의 연주를 한다.

99%의 재능으로 태어난 아티스트의 삶은 이런 게 아니어야 하지 않나? 놀면서 뒹굴뒹굴, 자유롭게 지내다가 아무도 해낼 수 없는 경지의 퍼포먼스를 짜잔 하고 보여줘야 하는데 실체는 성실한 반복뿐이다.

그러나 월드 베스트 수준이 되려면, 나아가 유지하려면, 재능에 더해 끝없이 지루한 반복을 견디는 성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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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하면 예쁜 드레스를 입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혼신의 연주를 한다. 마지막에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이 정도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는 듯 퇴장한다. 그게 내가 갖고 있는 피아니스트의 이미지였다. 백혜선의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다산북스)는 그 인상을 부숴버린다. 중학교를 다니다 유학을 가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상위 입상을 했다. 20대에 서울대 음대 교수로 부임했으나 사직 후 다시 미국에서 전문연주가로 활동하다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언뜻 타고난 재능에 부모의 조기교육이 합쳐진 전형적인 성장 서사로 보이지만 실상은 무척 달랐다. 대구에서 취미로 피아노 치다 서울로 유학 오고, 선생님이 미국에 같이 가자고 하자 중학교 2학년 때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유학을 갔다. 완고한 아버지는 콩쿠르 우승 후 연 첫 독주회에야 처음 참석했고 비로소 “하버드 다니는 남자랑 결혼하라고 유학 보냈더니 이런 공연을 하냐”며 무심하게 인정을 했다. 몇 달 후 아버지는 사망한다.

부모의 전폭적 지원과 계획 속에 착착 성장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매번 선택하고 선택을 증명하기 위해 우직한 반복을 했다. 그는 피아노를 하루라도 연습하지 않으면 근육이 풀려버리는 운동으로 정의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틀리지 않고 100번을 연주하는 연습을 했다. 끝없는 반복을 하면 근육 훈련을 넘어 정신적 연마가 되면서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자신의 음악 자체가 되는 순간이 온다. 이걸 8세 꼬마 때부터 매일 빼놓지 않고 하면서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좀 지긋지긋하다.

귀국 후 서울대 교수가 되었고 이제는 안정적 삶과 명예를 누려도 된다. 그렇지만 10년 후 두 아이만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다시 끝없는 연습과 연주, 육아를 병행하는 피 말리는 불확실성을 선택한다. 99%의 재능으로 태어난 아티스트의 삶은 이런 게 아니어야 하지 않나? 놀면서 뒹굴뒹굴, 자유롭게 지내다가 아무도 해낼 수 없는 경지의 퍼포먼스를 짜잔 하고 보여줘야 하는데 실체는 성실한 반복뿐이다. 물론 재능이 없이는 연습을 아무리 한다 해도 프로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월드 베스트 수준이 되려면, 나아가 유지하려면, 재능에 더해 끝없이 지루한 반복을 견디는 성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백혜선은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연습하면서 기다리는 삶이 어떤 보상보다 의미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어딘가로 도달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도 믿는다. 정점을 지나 서서히 하산의 길목에 서 있지만 여전히 편한 삶을 유지하기보다 불안하지만 성실하게 내 삶을 실험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을 믿는 것에서 오지 않았을까.

물 위에 떠 있는 백조가 우아해 보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백조만 안다. 왜 저렇게까지 사는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게 레벨을 만든다는 걸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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