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뉴욕의 고독, 핍진한 빛으로 비추다
자본주의 급속 발전한 도시 풍경
냉혹한 문명·왜소해진 인간 담아
작품 160여점 자료 110여점 전시
대표작 거의 나오지 않아 아쉬워
반세기 전 뉴욕의 고독은 지금 서울의 고독과 무엇이 다를까.
지금 서울에 들어온 미국의 리얼리즘 거장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그림은 한국 관객들에게 그렇게 웅변하듯 울림을 전한다. 화폭의 도시 사람들 자태와 그들이 있는 건물공간에 스며들고 드리워진 핍진한 빛과 우울한 그림자들이 화가의 목소리가 된다. 지난 20일부터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3층에 내걸린 호퍼의 회고 전 ‘길 위에서’는 스며드는 빛과 드리워진 그림자로 화폭에 1930~1960년대 대도시 뉴욕의 풍경을 꾸려 넣었던 호퍼의 작품들이 한국 애호가들과 처음 만나고 있다. 미국 휘트니미술관 공동기획으로 드로잉과 판화, 유화, 수채화 등 작품 160여점과 ‘산본 호퍼 아카이브’의 자료 110여점 등 270여점을 선보이는 큰 전시회다.
호퍼는 태어나기 250여년 전 유럽 네덜란드의 델프트를 누비며 그렸던 장인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탁월한 계승자였다. 둘의 감수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베르메르가 상업문화가 발흥하는 역동적인 바로크시대 네덜란드 도회인들의 풍경을 따듯하면서도 밝은 빛의 실루엣으로 묘사했다면, 호퍼는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한 1930~1960년대 대도시 뉴욕의 풍경을 다분히 음울한 빛으로 비추면서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냉혹한 단면과 왜소해진 익명의 인간 내면을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주었다. 이 시대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스위스 작가 페터 춤토르는 이런 익명성과 일상성을 호퍼의 미덕으로 예찬했다. 그의 책 <건축을 생각하다>에서 일상의 평범한 것 속에도 능력이 있으며, 그것을 찾아보려면 충분히 오래 응시해야한다는 것을 호퍼의 그림이 말하고 있다고 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8개의 섹션별 구성을 취하고 있다. 호퍼는 대공황시기인 1930년대 이후 미국 뉴욕 사람들의 휑한 일상과 내면을 담은 작품들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을 그린 화가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한국 회고전은 호퍼의 작가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지역들을 중심으로 열쇳말들을 뽑아내며 그의 작품세계가 형성된 배경을 살펴보고 있다.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대표작인 <햇살 속의 여인>을 들머리에 내건 첫 섹션 ‘에드워드 호퍼’는 초창기와 장년기의 습작과 자화상, 고향인 뉴욕주 나이액의 고향 집과 연관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고향 집의 분위기가 감도는 1949년작 <계단>과 집 바깥 숲의 풍경 등을 그린 이 섹션 작품들은 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자연의 대비, 둘 사이의 통로인 계단, 창문, 현관문 같은 호퍼 작품의 주요 모티브들을 주로 집어냈다. 2섹션은 파리다. 삽화가의 삶을 시작한 청년 호퍼는 예술가의 야망을 품고 1906년 서구 예술의 수도였던 프랑스 파리로 간 뒤 1910년까지 세 차례 머물면서 벌인 낯선 야외 사생 그림들이 나왔다.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 농후한 작업들인데, 파리 카페를 배경으로 피에로와 남녀들이 섞인 내부 풍경을 사생한 뒤 뉴욕에서 완성한 <푸른 저녁>(1914)이 파리 시민 군상들을 스냅사진 찍듯 스케치한 수채화 소품 등이 눈에 띈다.
고갱이는 뉴욕을 다룬 3, 4섹션. 평생 머물렀던 뉴욕의 풍경과 뉴욕 시민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 이어진다. 마천루와 고가철도, 큰 도로 등이 건설된 현대 도시의 위압적 면모보다 낡은 건물들과 다리가 펼쳐내는 수평 구도를 통해 가뭇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속성과 속도를 강조하는 기계문명에 대한 불안한 감수성 등이 엿보이는 풍경연작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뉴욕섹션에 사실상 딸린 ‘길 위에서’ 섹션에서 또다른 대표작 <철길의 석양>을 만난다. 해가 지는 장엄한 정경 아래 철길 옆의 신호탑과 녹색 언덕이 작가의 기억과 상상력이 버무려져 펼쳐지고 있다. 어메리칸 리얼리즘의 작가이자 60년대 이래 미국 팝아트와 슈퍼리얼리즘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그지만, 자신의 유년 장년기 여행의 추억과 상상력을 더한 낭만주의적 면모의 작업 스타일 또한 내내 지속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뉴잉글랜드’ 섹션은 그가 즐겨 여행하고 거처를 삼았던 뉴잉글랜드 지역의 풍경화연작들인데, 어촌과 절벽 등이 등장하는 해안 풍경이 그려졌다. 지역 우체국장한테 대여한 집을 그린 <벌리 콥의 집, 사우스트루로>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 걸었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이외에 작가의 뮤즈로 평생 그와 함께 하며 매니저 구실을 했던 화가이자 후견인 조세핀 호퍼(1883∼1968)도 따로 섹션을 차렸다. 호퍼의 전시 이력과 작품 판매 등의 정보가 담긴 장부를 통해 30년 이상 그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던 부인 조세핀의 뒤안길을 만나게 된다.
아쉽게도 저 유명한 대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비롯해 <아침 햇살>, <주유소>, <호텔방> 연작 등 30~60년대 대공황 시절과 소비문화시대의 미국 대도시 익명 군상들의 쓸쓸한 내면을 비추는 대표작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시카고미술관 소장)만 해도 15억원이 훌쩍 넘는 대여 개런티를 부담하는 건 국내 미술관이나 블록버스터 기획사들의 재정 형편상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이면, 차라리 전시 틀 자체를 아카이브 기획전이나 드로잉 스케치 소품을 중심으로 한 특별전의 성격으로 알리고 보여주는 것이 실체에 부합하지 않을까. 전시는 8월20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그림도판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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