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100년 전 사람 구한 썰매개, 게놈 프로젝트가 복원
1925년 알래스카서 활약한 썰매개 발토 모습 알아내
150마리가 1100㎞ 이어달려 디프테리아 치료제 운반
질병 연구, 멸종 위기 동물 보전에도 새로운 길 제시
1925년 1월 미국 알래스카 북서부 외딴 도시인 놈(Nome)에서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감염병인 디프테리아가 돌았다. 현지인들은 세균성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고, 디프테리아균의 독소를 중화할 혈청도 떨어진 상태였다. 악천후에 비행기가 뜨기 힘들고 철도도 연결되기 전이었다. 영하 40도의 알래스카 겨울에 움직일 수 있는 건 개 썰매뿐이었다. 썰매꾼 20명과 썰매개 150마리가 혈청 운반대를 꾸렸다.
보건당국은 알래스카 남쪽 항구도시 앵커리지에서 네나나까지 일단 철도로 혈청을 전달했다. 놈과 네나나 사이는 개썰매가 맡았다. 썰매개들은 16마리씩 한 팀을 이뤄 100㎞씩 혈청을 운반했다. 이렇게 ‘혈청 이어달리기(Serum Run)’로 놈과 네나나 사이 왕복 1100㎞를 5일 반나절만에 주파하고, 마침내 2월 4일 군나르 카슨이 탄 썰매가 가장 먼저 놈에 도착했다. 개들을 이끈 썰매개 발토(Balto)는 일약 영웅이 됐다. 지금 뉴욕의 센트럴파크에 있는 개 동상이 바로 발토이다.
현대 과학이 100년 전 알래스카의 눈보라를 뚫고 사람들을 살렸던 썰매개의 모습을 복원했다. 미국 산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UC)의 베스 샤피로(Beth Shapiro) 교수와 코넬대의 히더 허슨(Heather Huson) 교수 연구진은 28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박제된 발토의 피부에서 채취한 디옥시리보핵산(DNA)에 담긴 유전정보를 해독해 생전 모습을 기록 사진보다 더 상세하게 알아냈다”고 밝혔다.
◇박제 DNA 해독해 썰매개 생전 모습 복원
연구의 발달은 개썰매 경주대회 챔피언 출신인 허슨 교수였다. 그는 썰매개 수의사 모임에서 발토 박제에서 DNA를 추출해서 분석할 수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 발토는 현재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허슨은 고유전체학 전문가인 샤피로 교수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마침내 발토 유전체(게놈)가 모두 해독됐다.
샤피로 교수는 발토의 게놈을 주노미아(Zoonomia) 프로젝트에서 해독한 포유류 유전정보와 대조했다. 전 세계 연구기관 50곳에서 150여명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몸무게가 2g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박쥐부터 150t이 넘는 대왕고래까지 포유류 240종의 유전정보를 해독하고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샤피로 교수는 이와 함께 브로드 연구소가 반려견 682품종을 해독한 유전정보도 활용했다.
연구진은 유전자를 토대로 발토는 서면 키가 55㎝로 사람 무릎까지 왔으며, 몸 전체가 검고 가슴과 다리 가장자리에는 황갈색도 띠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슴부터 배는 흰색이었다.
유전정보로 보면 발토는 알래스카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정도로 지구력은 뛰어났지만 속도는 조금 떨어졌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밝혔다. 논문 제1 저자인 캐슬린 문(Katherine Moon) 박사는 “100년 전에 죽은 한 동물의 모습을 유전정보로 다시 되살린 것은 처음”이라며 “전에 해보지 못한 일이어서 다시 발토가 길을 이끄는 탐험을 나선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발토는 썰매개 사육가인 레온하르트 세팔라가 시베리아에서 수입한 썰매개의 후손이다. 사피로 교수 연구진은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발토가 그린란드 썰매개와 시베리안 허스키와 같은 계통이지만, 중국의 주인 없는 떠돌이개(village dog)도 유사성이 있었다고 밝혔다. 1995년 할리우드 배우 케빈 베이컨이 발토의 목소리를 연기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늑대개로 묘사됐지만, 유전자에는 늑대와 유사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연구 대상은 진짜 영웅견 토고
미국 브로드 연구소의 엘리노어 칼슨(Elinor Karlsson) 박사가 이끈 주노미아 프로젝트는 이날 사이언스에 연구 논문 11편을 발표했다. 이번에 분석한 240종은 포유류 과(科)로 보면 80%에 해당한다.
게놈에서 지난 1억년 동안 모든 포유류에 변하지 않고 남은 영역은 생명 활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주노미아 연구진은 해당 영역은 단백질 합성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이곳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각종 질병이 나타나는 것을 희소 뇌종양에서 입증했다.
포유류가 오랜 진화 과정에서 원래 대로 간직한 게놈은 어떤 식으로든 생명현상을 좌우하는 단백질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합성될지 지시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연구진은 인간 게놈에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유전자는 1%에 그치지만, 기능이 있는 것은 그 열 배인 10%라고 추정했다. 이번 연구는 질병 진단과 치료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이다.
동물 연구에도 새로운 장이 열릴 수 있다. 샤피로 교수는 “멸종위기 동물을 찾고 구하는 데 게놈의 예측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동물 연구는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했다. 멸종위기 동물은 서식지가 얼마나 파괴됐는지, 남은 개체는 얼마인지 오랜 시간 현장 조사를 통해 알아내야 했다. 돈과 시간이 없으면 알 방법이 없었다.
주노미아 프로젝트는 유전정보만으로 동물의 위기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주노미아 연구진은 게놈 비교 연구를 통해 이스라엘 갈릴리 산맥의 장님두더지쥐는 예상보다 잘 견디고 있지만, 범고래는 생태계 최고 포식자임에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썰매개 게놈 연구도 계속될 전망이다. 다음 목표는 발토와 함께 혈청 이어달리기에 참여했던 토고(Togo)이다. 사실 100년 전 혈청 이어달리기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토고였다. 1100㎞ 경로 중 425㎞를 토고가 이끈 썰매개들이 도맡았다.
토고는 당시 썰매개로 최고 능력을 인정받아 후손을 많이 남겼지만, 발토는 일찌감치 중성화됐다. 하지만 발토가 마지막 85㎞를 맡아 토고보다 더 주목받았다. 썰매개들의 주인이었던 세팔라는 생전 발토에게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는 데 대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연구진은 앞으로 토고의 박제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해 썰매개 유전자 드라마의 2막을 펼쳐 보이겠다고 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토고의 복권이 이뤄졌다. 토고는 2019년 동명의 디즈니 영화에서 당당히 주연을 맡았다. 할리우드 배우 윌렘 데포는 토고의 주인이자 썰매개 조련사인 세팔라 역을 맡았다.
참고자료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bn5887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bn5856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d2209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h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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