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불온한 서정시’로 가능주의자가 되겠다는 시론
문명·생태 위기에서 요구되는
서정시의 새 윤리 짚어 내면화
“시도, 시론도 필사적으로
그어대던 성냥의 불꽃처럼”
문명의 바깥으로
나희덕 지음 l 창비 l 2만원
시인의 시론집엔 평론가의 시론집이 절대 감당 못할 구성요소가 하나 있겠다. 누군가의 시를 파 들출수록 드러나는 건, 제 시에 요구되는 당위로서 실천으로서, 시인 스스로 파 놓게 되는 덫. 등단 34년차 시인 나희덕(57)이 새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의 책머리에 새긴 글대로다.
“시를 쓸수록 시를 읽을수록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조심스럽고 어려워진다. 다른 시인의 시에 대해 말한 것이 내 시의 발목을 잡는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말들을 남겼다니… 이 패총(貝塚) 같은 글들을 떠나보내며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이 책이 또 하나의 문턱 또는 매듭이 되어 한두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명의 바깥으로, 시의 바깥으로.”
이 서언은 2018년 시집 <파일명 서정시>의 ‘시인의 말’과 닿는다, 아니 닿을 수밖에 없다.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시인이 된 지 삼십년 만에야 이 고백을 하게 된다.”
<문명의 바깥으로>는 시인 나희덕이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2003) 이후 20년 만에 내놓은 자신의 두번째 시론집이다. 문예창작과 교수로서 기성 작품을 텍스트 삼아 시 창작론을 추린 <한 접시의 시>(2012, 창비)를 시론집으로 쳐도 10년이 넘는다. 남의 시에 또 ‘망치’를 들어 제 시에 또 ‘못’을 박겠다는 표명의 계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마따나 “한국 현대시의 한 중력”이 된, 나희덕 시인의 중생대를 가장 잘 설명하는 ‘사건’으로 ‘파일명 ‘서정시’’를 꼽아보려 한다.
누가 뭐래도 서정시에 다 걸기 하는 그가 박근혜 정부 때 문체부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원에서 배제된 서사적 사태를 겪으며 쓴 시가 ‘파일명 ‘서정시’’이고, 시인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탄식해야 했다. 겨우 9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이제 서정시는 푼더분히 서정하는가. 아닐 것이다.
한 세대를 넘나든 시력의 닻을 거두며 돛을 올리는 좌표로서 읽고 새긴 시와 철학이 이번 시론집 1부를 구성하거니와, 소제목들만으로 고스란히 한국시의 ‘서정적 항전’의 궤적이 드러나고 자신의 시적 항로를 예고한다.
첫 장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부터 그러하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는 지배적 감각체계를 바꾸고 새로운 윤리를 모색하는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진단을 책에서 먼저 증거하는 이들은 시인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이다.
노동 생태로 지평을 넓히며 사회적 재난 탓에 “시가 무모해지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의 서언, 백무산, 2015)며 오감의 증언을 감당하거나, 이러한 폐허에서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시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와 같이 절망하되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후기, 허수경, 2005)는 시적 낙관을 불사하거나, 여성시에서 나아가 가령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피어라 돼지’, 김혜순, 2016)로 대변될 타자 되기, 말하자면 빙의의 미학으로 모든 경계 자체를 지속해 허물어온 서정시의 불온들.
때문에 1장은 이후 더 논의되는 2장 ‘흙의 시학’, 3장 ‘인간-동물의 관계론적 사유와 시적 감수성’을 자연스레 개관하기도 한다.
나희덕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동의어”라고 말한다. 시가 퇴비가 되고 흙이 되는 까닭이며, 당초 나희덕의 등단시 ‘뿌리에게’(1986)의 화자가 흙이란 점에서 발단하여 마침내 벼려진 결론일 듯하다. 실제 그는 다음 시집을 두고 25일 <한겨레>에 밝힌바 “그간 9권의 시집이 인간에 대한 것인데 비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단 생각을 하게 됐다, 10번째는 생명체의 존재론을 주제로 탐구하며 쓰고 있다.” 시집의 주제가 먼저 설정된 건 처음 있는 일로, 이번 시론집으로 예고되는 격이다.
2부, 3부는 나희덕의 편애가 여실히 드러나는 시인론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부와 우정의 기록에 가깝다”는 전제로, 그 가운데 단명한 시인 3인을 되살린 대목은 각별하다. 기형도(1960~1989), 박영근(1958~2006), 최영숙(1960~2003)을 “자연을 매개로 한 전통 서정시에 대한 회의”를 예감한 자의 죽음, “나에게는 현실이 없었다”(‘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는 거리에서의 죽음, 병자로서 “나는 오래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 허공에 들린 발을 내려놓지 못하”(‘오래된 저녁’)는 선험의 죽음 따위로 각기 짚어가며, 나희덕은 이들에게서 스스로 ‘부채’를 지어 제 ‘소명’으로 변제하려는 태도를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새삼 주억거리게 만든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인에 빚지고 있었다, 잊고 있었다.’
시인 김수영에 대한 회고에서 그 태도는 거듭 확인되므로 이또한 나희덕이 스스로에 쳐놓은 덫인 모양이다.
“마흔살 무렵 다섯번째 시집 <사라진 손바닥>(문지, 2004)을 낸 후 시에 대한 피로감과 무력감이 찾아들었다. 몸과 마음에 물기 한점 남아 있지 않은 듯했고, 더이상 시를 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시 김수영의 연보를 펼쳐 들었다.”
“김수영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어느새 나는 죽은 김수영보다 훌쩍 많은 나이가 되었다… 그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시를 써온, 그리고 써나가야 할 시간을 헤아려본다…”
“저항과 사랑, 현실과 문학, 김수영에게는 그 모든 게 하나였다.”
김수영의 초상 아래 적어둔 문구를 되새김질해 썼다는 문장이 바로 <파일명 서정시>의 서언이다. 닻과 돛과 덫의 시들이 바로 나희덕이 지어가려는 서정시의 정체이고, 덫을 풀지 못하므로 서정시의 쇠퇴, 서정시의 종말에 누구보다 저항하여 기어코 말한다.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가능주의자’ 부분, <가능주의자>, 2021)
이제 나희덕이 언급한 신예 시인 조온윤, 박규현의 시를 읽어보려 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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