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과학은 ‘실행세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책&생각]
20세기, 그 너머의 과학사
존 에이거 지음, 김명진·김동광 옮김 l 뿌리와이파리 l 4만2000원
20세기의 문턱에서 막스 플랑크가 양자 이론의 기초를 닦는 데에는 앞서 여러 열역학자들의 고민이 있었는데, 그들의 연구를 뒷받침해준 것은 온도와 광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싶어 했던 전기산업체들과 이를 표준화하고 싶어 했던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논문’을 발표하기 두 달 전인 1905년 4월, 그가 일하고 있던 스위스 베른 특허국에 접수된 것은 “전자기적으로 전자를 제어하여 멀리 떨어진 진자시계와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내용의 특허출원서였다. 특허심사관으로서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전기 기술과 산업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사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존 에이거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과학기술학)가 쓴 <20세기, 그 너머의 과학사>는 전형적이지 않은 새로운 틀을 앞세워 20세기 이후 과학사를 두툼하게 읽어내려 시도한 책이다. 틀을 대표하는 개념은 ‘실행세계’(working world)인데, 이는 “문제를 발생시키는 인간의 프로젝트가 실행되는 무대”다. 과학이라는 상아탑이 별도로 존재하고 이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실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애초 과학은 실행세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과학에는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이 있다”는 식의 서술도 있지만, 지은이는 ‘맥락’이란 상투적 문구로는 그 전모를 밝히기 부족하다고 여긴다. “과학은 실행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추상화되고 단순화된 대리물을 만들고, 조작하고, 경합하는 활동”이다. 기초과학-응용과학 구분은 무망하며, 과학은 그 자체로 ‘응용세계’다. 기존 과학사는 위대한 과학자들과 그들의 성취를 밤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불빛들처럼 파악할 뿐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그 바깥과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과학기술학에 기대어, 지은이는 빛으로 감춰졌던 적나라한 도시의 모세혈관들을 낮하늘에서 내려다보듯 파악하는 데 집중한다.
책은 1900년 이후 새롭게 등장한 과학을 물리학, 생명과학, 자기(self)의 과학 등으로 나누어 조망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시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촘촘하게 훑는다. 새로운 과학은 실험실이라는 존재로 대표되는, ‘유사한 것의 수출’이라는 19세기의 유산을 활용해 확산됐다. 이를테면, “새로운 물리학은 19세기의 산업 및 전지구적 통신 네트워크라는 실행세계에 대한 대응이었다.” 독일 가스수도전문가협회는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 “빛을 측정하는 더 나은 장치와 더 나은 광도의 단위를 개발해달라” 요청했는데, 이렇게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 축적된 데이터들이 양자 이론 태동에 밑거름이 됐다. 소다 제조 공정으로 큰 돈을 번 솔베이가 재정을 지원한 ‘솔베이 회의’는 흔히 양자 이론이 본격화된 장으로 여겨지지만, 그보단 실행세계의 후원을 끌어들이려는 “물리학자들의 제도적 야심을 보여준 순간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생명과학에도, 새로운 자기의 과학에도 배경에는 농업, 우생학, 전기산업, 교육 정책 등의 실행세계가 있었다.
1차대전은 과학이 “조직적인 방식으로,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계기였다. 다만 ‘순수한 과학이 이데올로기에 휘둘렸다’는 인식과 달리, 조직 및 관리의 증가는 위에서 강제된 것이 아니라 과학 스스로 요청한 것이기도 했다. “공기에서 빵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 프리츠 하버의 삶과 업적은 과학, 산업, 군대라는 실행세계들 사이의 연계를 잘 보여준다.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에서 일하던 그는 화학회사 바스프와 함께 값싼 비료 제조로 농업혁명에 이바지할 암모니아 생성 공정을 만들어내는 등 “공기에서 빵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암모니아 대량 생산은 폭약 생산 등 “1차대전 시기 독일의 전투 능력을 유지하는 데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이저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장으로서 유력 인사가 된 하버는 독일군의 승리를 위해 염소를 가지고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데에도 앞장섰고 이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20세기 이후의 과학 전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미국 과학의 영향이다. 19세기 엄청난 부를 쌓은 미국의 기업가들은 여러 이유로 자선사업에 나서면서 과학과 관계를 맺었고, 특히 물리학자 조지 엘러리 헤일은 “순수연구의 후원자로서 새로운 자선재단들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한 최초의 지도적 미국 과학자”로 꼽힌다. 캘리포니아에 자리를 잡은 헤일은 카네기 재단으로부터 천문대 건설 자금을 따냈고, 1917년에는 이후 수많은 우주의 비밀을 밝혀낼 윌슨산 100인치 반사망원경을 제작·설치했다. “천문학은 미국의 지도적 지위를 보여준 첫 번째 과학이었다.” 특히 석유산업은 과학의 든든한 후원자였는데, 원유에서 가솔린 추출의 비율을 크게 늘린 ‘열분해’ 공정의 개발은 “20세기 과학이 낳은 가장 수지맞은 결과”였다. 효율적인 석유 탐사를 위해 석유산업은 중력장 연구, 음파 탐사, 항공 감시 등의 과학기술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과학 관측 및 실험 기기들의 거대화, 후원자와 산업의 역할 증대, 상호연결, 과학적 리더십, 대규모 조직과 전문가의 계획 수립, 규모의 확장, 간학문성 추구 등은 미국 과학이 만들어낸 경향이었다.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분자생물학 분야를 새롭게 개척한 라이너스 폴링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로 꼽힌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2차대전과 냉전 역시 20세기 과학에 큰 유산들을 남겼다. 핵무기 개발은 과학과 기술이 아예 항구적으로 동원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 대안으로 자동화, 전자공학, 컴퓨팅 등 “이전보다 적은 인력으로 더 파괴적인 무력을 운용하는 기술에 대한 투자”가 발전했다. 인공지능, 기후변화, 참여과학, 나노과학 등 비교적 최근까지의 과학사를 포괄하는 한편, “에너지 집약 사회와 국제 환경 거버넌스, 그리고 전지구적 상업의 시선 사이의 갈등이라는 실행세계가” 빚어내고 있는 21세기 과학에 대한 전망도 담았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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