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포레스트 검프’… 경계선지능인을 아시나요?
김현수(가명·27)씨는 어렸을 땐 그저 말문이 늦게 트인 아이였다. 하지만 유치원에 입학한 뒤부터 ‘보통 아이와 다르다’는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초등학교 땐 또래에 견줘 학습 능력이 떨어지고, 말투가 어눌해 제 생각을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다 보니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생활이 힘든 김씨는 우울 증세와 강박 행동을 보였고, 성적도 최하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까스로 2년제 대학에 들어갔지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맞고 욕 들으며 배우려고 애썼지만…
입대한 훈련소에선 ‘관심병사’가 됐다. 총기 분해 뒤 조립을 못 하고, 행군할 때는 군장 꾸리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자대 배치 뒤엔 ‘아무리 가르쳐도 못 알아먹는다’며 선임병에게 폭행을 당했고, 참다못한 김씨는 투신자살까지 시도했다. 김씨는 결국 현역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제대 후 김씨는 주유소와 편의점, 호프집, 가구공장 등 30개가 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기 일쑤였다. 심지어 “너 장애 있느냐”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김씨는 “주먹으로 맞아가면서 일을 배우고 온갖 욕을 들으면서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한달을 넘기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지금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빈 병을 모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김씨는 “어르신들의 일자리를 뺏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현실에 자괴감도 든다. 다른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이전 상황이 반복될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25명 학급에서 3~4명이 경계선지능인
지적장애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평균 지능에 미치지 못하는 인지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 지능지수(IQ) 71~84 사이의 ‘경계선지능인’이다. 이들은 ‘장애정도판정기준’에 명시된 ‘지적장애’ 기준(지능지수 70 이하)에 해당하지 않아 장애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이 탓에 ‘장애인복지법’ 등 관련 법령에 의한 지원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평균 지능(85~115)에는 미치지 못해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학습 부진아’ ‘사회 부적응자’ 낙인이 찍힌 채 차별과 불이익을 받으며 살고 있다. ‘지능지수 73’인 김현수씨가 그렇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도 지능지수 75인 경계선지능인이다.
김현수씨와 같은 경계선지능인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국내엔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다. 개념부터 생소하다 보니 제대로 된 실태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다만 지능지수 정규분포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13.59%가 경계선지능인으로 추산된다. 주민등록 인구가 3월 현재 5141만4281명인 점을 고려하면 대략 698만7200명 정도가 경계선지능인에 해당하는 셈이다. 학생 수가 25명인 학급에선 3~4명 정도가 경계선지능인일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이스라엘에서 16~17살 남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15.3%가 경계선지능인이었다.
지원기관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
이들은 지적장애는 아니지만 기억력·언어발달이 부진하고 주의력이 산만한데다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도 떨어져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송연숙 사단법인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은 “경계선지능인 아이를 장애인 복지관 같은 곳에 데려가면 ‘말을 잘하는데 왜 왔냐’고 하고, 일반 학교에서는 ‘이상하다’ ‘수업에 방해된다’며 장애인 취급을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공교육에서 답을 찾지 못한 학부모들은 사교육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지원기관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나마 있는 것도 수도권에 집중된 탓에 비수도권 지역 학부모들은 원거리 출장 교육을 감내해야 한다. 비용도 부담이다. 집단사회성과 언어·인지치료 등에 드는 사교육 비용만 한달에 10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최수진 경계선지능인 지원센터 ‘느린소리’ 대표는 “제대로 된 인지 훈련을 받으려면 서울이나 인천까지 가야 한다. 인지 훈련 하나만 해도 원래는 주 3~4회 정도 받아야 하는데 아이 학교와 부모 직장 때문에 평일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니 지역에서는 주 1회 훈련이라도 받기 위해 토요일을 이용해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 교육 자체가 힘드니 국가가 교육을 지원해주는 나라로 이민 간다는 사람까지 있다”고 하소연했다.
지원에 필요한 법적 근거도 없어
경계선지능인 학부모들과 전문가들은 학교 교육뿐 아니라 평생에 걸친 생애주기별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조기에 발견해 전문적인 치료·교육만 충실히 하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박현숙 경계선지능연구소 느리게크는아이 연구소장은 “지금처럼 지원이 부족하고 비효율적인 상태가 계속되면 실업과 장애, 정신건강 문제로 이어지고 이들을 돌보는 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든다. 전체 인구의 14%에 이르는 경계선지능인이 복지 서비스에 의존하는 피부양 인구가 될지, 생산가능 인구가 되어 경제발전에 기여하게 될지 갈림길에 섰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경계선지능인을 지원할 제대로 된 법적 근거조차 없다. 2020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여러 지자체들이 조례 제정과 정책연구 개발을 진행하고 있지만 조례마다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고, 지원체계도 천차만별이다. 서울지원센터 연구기획팀에서 일하는 안단비씨는 “지난해 6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원센터가 서울에 만들어졌지만 아직 대부분 지역에선 전담 조직은 고사하고 조례조차 제정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자치법규정보시스템을 확인해보면, 부산 등 21곳이 ‘경계선지능인’이란 이름으로 조례를 제정했는데, 경기 오산시 등 9곳은 ‘느린학습자’란 명칭을 사용한다. 강원 춘천시에서는 상위 법령이 없다는 이유로 조례가 부결되기도 했다.
“저는 이 현실에 절망할 뿐이었습니다”
별도의 입법을 통해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제도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구체화되고 있다. 지난 3일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춘천·철원·화천·양구갑)은 생애주기별 지원을 위한 ‘경계선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는 지난해 5월 춘천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가 경계선지능인이 처한 어려움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허 의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갖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지만 700만명 가까이 되는 경계선지능인들이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당하며 외롭게 싸워오고 있다. ‘다음’이 아닌 ‘지금’ 당장 법을 제정해 국가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계선지능인 장영걸(23)씨가 힘들 때 쓴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저는 이런 가정을 극복해보려 여러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지능지수 72인 ‘경계선지능인’이었고 사회는 저 같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려 하며, 저는 이 현실에 절망할 뿐이었습니다.” 장씨 같은 이들이 편견과 차별에 좌절하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날은 언제쯤 올까.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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