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노동 떠안고도 역사에 남지 못한 여성 요리사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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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치비오 맥스'(HBO MAX)의 <줄리아> 는 1960년대 미국의 전설적인 티브이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 줄리아 차일드를 다룬 드라마 시리즈이다. 줄리아>
그럼에도 <줄리아> 를 비롯, 보니 가머스의 베스트셀러 <레슨 인 케미스트리> (심연희 옮김, 다산책방), 그리고 최근 국내 출간된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 은 집밥과 연결된 여성성의 신화를 점검하고, 매일 하는 요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품들이다. 미스> 레슨> 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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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
애너벨 앱스 지음, 공경희 옮김 l 소소의책(2023)
‘에이치비오 맥스’(HBO MAX)의 <줄리아>는 1960년대 미국의 전설적인 티브이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 줄리아 차일드를 다룬 드라마 시리즈이다. <줄리아>의 첫 번째 시즌 7회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줄리아는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뉴욕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대받는다. 여기서 줄리아는 당시 <여성성의 신화>를 출간한 베티 프리단을 만나는데, 프리단은 줄리아가 다른 여성들에게 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줄리아는 미국 여성들에게 프로다운 요리를 하는 법을 가르쳤지만, 그 때문에 준비하고 치우는 데 몇 시간씩 걸리는 요리를 하는 짐까지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리단의 말에 담긴 현실을 깨달은 줄리아는 존재가 흔들리는 충격을 받는다.
요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아직도 또한 적잖이 여성성과 연결된다. 온갖 가전기기가 보조하는 이 시점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프로로서 요리사를 다룬 이야기에서는 남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지만, 매일의 집밥을 다루면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줄리아>를 비롯, 보니 가머스의 베스트셀러 <레슨 인 케미스트리>(심연희 옮김, 다산책방), 그리고 최근 국내 출간된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은 집밥과 연결된 여성성의 신화를 점검하고, 매일 하는 요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품들이다.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은 현대 요리책의 기틀을 마련한 실존 인물 일라이저 액턴과 그의 조수였던 주방 하녀 앤 커비의 삶을 기록과 상상을 조합해 재구성한 역사소설이다. 19세기 영국, 일라이저는 자기 이름으로 시집을 내려고 하지만, 출판업자 롱맨은 일라이저의 시 원고를 거절하고 요리책을 써오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파산으로 어머니와 함께 하숙집을 열게 된 일라이저는 어린 하녀 앤을 고용하여 책을 쓰기로 한다. 앤은 전쟁에서 한 다리를 잃은 아버지와 정신이 흐릿해진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로, 이전에는 부드러운 빵 한 조각 제대로 먹어본 적 없었으나 타고난 미각으로 일라이저를 돕는다.
<줄리아>의 장면처럼 실제로 ‘집밥’ 예찬은 여성의 꾸준한 가사 노동 부담을 전제한다. 하지만 숙녀가 주방에 들어가는 것도, 책을 쓰는 것도 허용되지 못하고 금기시되던 시대에 요리책 출간이란 하나의 주체적 사회 활동이었다. 현재 보는 요리책에서 재료와 용량,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확립한 사람이 바로 액턴이었다.
또한 이 책은 역사에 이름이 남지 못한 수많은 여성 요리사를 위해 쓰였다. 보조인 앤 커비는 일라이저 액턴의 <현대 요리>에는 이름이 적히지 않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허구의 개인사를 부여받으며 존재가 드러난다. 미친 여자, 가난한 여자, 결혼하지 않은 여자, 글 쓰는 여자들이 지워졌던 시대를 거쳐, 지금 비로소 어렴풋한 빛 속으로 들어온다. “복숭아 6개 또는 8개 (소금물에 사흘간), 식초 1쿼트, 통백후추 2온스, 으깬 생강 2온스, 소금 1티스푼, 육두구 2개 (가루), 겨자씨 1/2 파운드 (10분).” 간결한 요리책의 문장은 어찌 보면 정교하게 절제된 시를 닮았다.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요리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이들이 오랜 노동으로 빚어낸 한 편의 시임을 기억한다.
박현주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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