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성 물질 나온다” 원전 괴담에… 해수담수화 시설, 2000억 고철 됐다
7년간 수백 번 검사해도 안전한데
환경단체는 “방사성 물질 나온다”
25일 오후 부산 기장군의 해수담수화 공장은 불이 꺼진 채 인기척이 없었다. 공장 밖 탱크 등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다. 바닷물을 담수로 바꿔 인근 주민들에게 공급하려고 세금 1248억원 등 2000억원을 들여 만든 시설이지만 ‘방사성 물질이 검출될 수 있다’는 괴담성 소문이 돌면서 고철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기장 해수담수화 공장은 국토부 R&D(연구개발) 사업으로 지어졌다.
부산시 등은 기장군 일대의 부족한 식수 확보를 위해 2008년부터 해수담수화 시설을 추진해 2014년 11월 완공했다. 부지 면적은 4만5850㎡에 달하고 민간 투자 706억원도 들어갔다. 해수담수화 설비는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염분이 섞일 것이란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설에서 11km 떨어진 고리 원전이 발목을 잡았다. 2015년 해수담수화 시설을 시험 가동해 만든 담수에선 기준치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단 한 번도 검출되지 않았다. 그런데 환경 단체 등은 “원전이 가까우니 삼중수소 같은 방사성 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주민 불안을 부추겼다. ‘방사능 물’ ‘핵 수돗물’ 같은 용어가 적힌 피켓이 마을 곳곳에 나붙었다. 주민들 불안도 커지면서 국내 첫 해수담수화 시설은 시범 가동도 멈춰야 했다.
부산시 상수도본부는 담수화 시설로 유입되는 바닷물과 생산한 담수의 수질을 수백 번 과학적으로 검사했다. 그런데 원전 가동으로 만들어지는 대표적 물질인 삼중수소(일반 수소보다 3배 무거움)는 주변 바닷물과 생산한 담수에서 한 번도 기준치(리터당 1~1.4베크렐) 이상으로 검출되지 않았다. 삼중수소는 우주에서 날아오는 방사선의 영향으로 자연 상태에서도 생성된다. 빗물에선 리터당 1베크렐 전후, 강물에선 1~2베크렐이 나온다고 한다. 이재기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명예교수는 “자연적인 바닷물에서도 0.01~0.5베크렐 정도가 검출된다”며 “일반 강물로 만든 수돗물보다 (기장군) 담수화 시설의 담수에서 삼중수소가 더 적은 것”이라고 했다. 리터당 1베크렐 이하면 마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부산시 수질연구소 관계자는 “미국위생재단(NSF)에도 10여 차례 삼중수소를 포함한 방사능 관련 52항목의 검사를 의뢰했지만 모두 수질 기준 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상수도본부 측은 “우리 검사 결과를 믿지 못한다고 해서 미국에도 열 번이나 검사를 의뢰해 ‘안전하다’는 결과를 받았는데 ‘방사능 물’이라고 딱지를 붙이니 정말 답답하다”고 했다. 만든 담수를 공무원들이 직접 마시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괴담성 소문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삼중수소 외 요오드, 세슘 같은 방사성 물질도 기준치를 넘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부산시는 낙동강 최하류 물을 상수원으로 쓰고 있는데 수질 악화와 오염 사고에 취약하다는 우려가 있었다. 취수원 다변화를 위해 노무현 정부 시절 해수담수화 시설을 추진했고 2014년 말 완공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기장군 일대 5만 가구에 하루 평균 4만5000t의 수돗물을 공급하고 있어야 하지만 ‘원전 괴담’에 세금 1248억원 등 2000억원이 날아갈 상황이다.
정부 관계자는 “해수담수화 시설보다 고리 원전에 훨씬 가까운 지역에 횟집도 많고 어업 활동도 활발하기 때문에 ‘방사능 물’ ‘핵 수돗물’이란 주장이 통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해수담수화 시설에 들어가는 바닷물 자체에서 기준치 이상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지 않는데 어떻게 만든 담수에서 삼중수소 등이 나온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시민 단체는 담수화 시설이 시험 가동되자 “원전 인근 해수 담수 방사능 물 공급 반대” “원전 인근 핵 수돗물 공급 반대” “방사성 물질이 포함됐을 수 있는 물 공급 반대”라고 했다. 정부 측이 담수화 시설을 짓기 전에 주민 의견을 듣고 예상되는 ‘괴담’을 반박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진섭 기장 해수담수화 반대대책위 대표는 “처음 공장을 세울 때 주민 의견을 제대로 듣는 절차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만약 다시 수돗물로 쓰겠다고 한다면 ‘제2의 해수담수화 반대’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기장군 일대는 멸치와 미역, 다시마 생산지로 유명하다.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는 김모(52)씨는 “아무래도 조금 불안하다”며 “수돗물이 공급된다고 해도 마시기가 꺼려질 것 같다”고 했다. 기장에서 자란 30대 여성도 “주변 의견을 들어보면 고리 원전수 이야기 때문에 먹지 않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반면 인근 지역의 한 주민은 “그 바닷물에서 자란 멸치회와 미역은 자주 먹으면서 그 바닷물로 만든 식수는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그 사이 시설은 고철로 변하고 있다. 민자(民資)로 참여한 두산중공업 직원 18명이 쓰던 사무실은 서류 더미만 굴러다녔다. 탈원전 폭주를 하던 문재인 정부가 관련 예산을 없애면서 시설 가동은 완전 중단됐다. 누적 적자 100억여 원을 기록한 두산중공업은 결국 철수했다.
한때 공업용수로 쓰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예산을 더 들여 관로(管路)를 새로 깔아야 하는 데다 하천수를 사용한 용수보다 최대 2배 이상 비싼 단가 때문에 수요처 확보에 어려움을 겪다가 무산됐다. 지난해 6월에는 상주하던 부산시 상수도본부의 수질 관리 직원 2명도 철수하고 현재 부산시 공무원 5명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해 말 ‘기장 해수담수화 시설 활용 방안’을 위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올해 12월 활용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할 계획이지만 현재 공장 재가동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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