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69) 부산 망미루

기자 2023. 4.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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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의 3·1운동이 시작된 누각…일제에 의해 옮겨졌다 80여년 만에 ‘귀향’
부산 망미루 1971년(좌), 2023년(우)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두 장의 사진은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망미루의 1971년 모습과 2023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망미루(望美樓)’라는 똑같은 현판이 붙어 있고 건물의 형태도 같지만, 왠지 다른 건물로 느껴진다. 그 이유는 건물이 서 있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망미루는 조선시대 부산 일대를 관할하던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관아의 누문(樓門)으로, 1742년 당시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자신의 집무실인 동헌(東軒) 앞에 세웠다. 오늘날로 치면, 망미루는 시청의 정문이라 할 수 있다. 망미루라는 이름은 후대의 어느 동래부사가 멀리 있는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붙인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누각에 통행 금지와 해제 시간을 알리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 동래도호부의 얼굴 역할을 하던 망미루는 일제강점기에 얄궂은 운명에 휩싸인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이 이 누각 위에서의 만세삼창으로 시작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제는 1930년대 시가지 정리사업을 하면서 망미루를 비롯한 동래도호부의 여러 건물을 허물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때 망미루는 동래온천에서 가까운 금정산 기슭의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진다. 금강공원은 동래온천을 개발한 일본인들이 만든 관광지다.

이전 과정과 관련해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철거 위기에 놓인 망미루를 구하기 위해 동래 지역민들이 돈을 모금하여 이전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이 개인 정원을 꾸미기 위해 옮겼다는 설이다.

1971년 사진은 원래의 자리가 아닌 온천동의 금강공원 입구에 서 있는 망미루이다. 거리 한가운데 나앉은 모습으로, 금정산을 오르려고 모인 등산객들, 이들을 상대하는 식당들이 보인다.

망미루는 1972년 부산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계속 엉뚱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2014년에서야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복원한 수안동의 동래부 동헌으로 돌아갔다.

2023년의 사진은 이전, 복원한 후의 모습이다. 그런데 망미루는 원래 자리에 이미 시가지가 형성이 되어서 인근의 어정쩡한 위치로 옮겨지고 말았다. 좁은 골목길과 마주한 망미루는 출입문의 기능을 거의 잃어버렸고, 주변을 둘러싼 현대식 건물들로 인해 옹색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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