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 같은 日자유민권운동, 천황 폐제의 헌법 초안도[한국인이 본 일본사/박훈]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2023. 4. 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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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뜨거웠던 한국 민주화운동에 비하면, 일본의 민주주의는 뭔가 미적지근한 느낌이라는 분들이 많다. 소리 내어 민주주의를 외치지도 않고, 광장에 잘 모이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하긴 일본의 데모 풍경을 보면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고, 구호 소리는 나른하기까지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주화운동도 뜨거웠던 때가 있었다. 바로 메이지 유신(1868년) 직후 벌어진 자유민권운동 시기에 그랬다. 오늘부터 이 칼럼은 20세기만이 아니라 전 일본사를 대상으로 한다.》
헌법제정과 국회개설 요구 커져

메이지 유신으로 탄생한 정권은 도쿠가와 가문만 배제했을 뿐 수구파, 온건개혁파, 급진개혁파 등 잡다한 세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급진개혁파는 폐번치현(廢藩置縣) 쿠데타(1871년)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러나 내분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정한론을 둘러싸고 급진개혁파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정한론 정변·1873년).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정한파를 이끌고 고향 가고시마로 물러났고, 정부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장악했다. ‘오쿠보 독재’의 등장이다. 그런데 정한론을 주장했던, 도사번(土佐藩) 출신의 일부 세력은 돌연 ‘국회 설립’을 주장하는 건백서를 내며 정부를 공격했다. ‘오쿠보 독재’는 출범하자마자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국회 설립 건백서(1874년)를 계기로 일본 전역에서 정치단체가 폭발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1874년에서 1890년 사이에 2055개의 정치결사가 생겨났다고 하니 가히 ‘결사(結社)의 시대’였다. 막말기(幕末期·도쿠가와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왕성했던 정치 에네르기가 신생 정권의 추이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분출한 것이다. 이들은 자유와 민권을 부르짖으며, 이를 보장해줄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를 ‘자유민권운동’이라고 한다.

그 절정은 1880년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1879년에서 1881년 사이에만 200개의 정치결사가 결성되었고, 1880년에서 1881년 사이에는 100건 이상의 의회 개설 건의서에 25만 명이 서명했다. 전국의 정치단체들은 국회기성동맹(國會期成同盟)을 조직하여 정부에 의회 개설을 압박했다. 신분제 폐지로 할 일이 없어진 옛 사무라이들이 대거 참여했다. 한편에서는 유신 후 물가 상승으로 큰 이익을 본 호농(豪農)들이 정치운동에 뛰어들며 가세했다. 정치결사는 도시뿐 아니라 지방에도 광범하게 확산되었다.

신문과 연설회 통해 반정부 활동

1880년대 전후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주요 수단이었던 연설회를 그린 삽화. 연설회에서는 연설자의 발언 수위를 통제하려는 경찰과 반정부 성향의 청중이 종종 마찰을 빚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자유민권운동의 주요 수단은 신문과 연설회였다. 유신 후 폭증한 신문사에는 정권에서 소외된 막부와 도사번의 인재들이 몰려들며 강력한 반정부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우편배달 신문만 계산해도 1873년 51만4610부에서 다음 해에 262만9648부로 무려 5배로 폭증했다고 하니 놀랄 만하다. 연설회는 자유민권운동의 ‘명물’이었다. 연설회에는 발언 수위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이 입회해 있었다. 흥분한 연사가 발언 강도를 높이면 경찰은 이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면 수백 명의 청중은 고함을 치며 경찰관을 욕하고 연사를 응원했다. 이 순간 연설회장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연사들은 다분히 이를 노리고 경찰관을 일부러 도발하곤 했다.

이 일본의 초기 민주화운동은 주로 헌법 초안 논의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이를 두고 ‘헌법 창출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 때까지 94종의 헌법 초안이 만들어졌는데, 그중에는 개인이 만든 것도 있었고, ‘오일시헌법(五日市憲法)’처럼 촌락민들이 헌법연구회 같은 모임을 만들어 높은 수준의 초안을 제출한 경우도 있었다. 이 헌법 초안은 지방자치권의 불가침성과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우위를 주장했다. 유명한 사상가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가 기초한 ‘일본국국헌안(日本國國憲案)’은 정부의 압제에 인민은 무기를 들고 저항해 정부를 타도할 수 있다는 저항권·혁명권을 명시했다. 우에키는 또 일본을 70주 정도로 나눠 연방국가로 해서 각 주의 자유독립과 독자의 군대 설치를 인정했다.

나중에는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어 버린 천황에 대해서도 애초에는 에누리가 없었다. ‘헌법초고평림(憲法草稿評林)’이라는 헌법 초안은 무도한 천황이 나타나면 폐제(廢帝)할 것과 부덕한 황태자는 천황 세습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나아가 황손 중에 제위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을 경우는 국회가 일반 인민 가운데 후보자를 뽑은 다음, 국민투표로 최종 결정한다는 구상마저 들어 있다. 이렇게 뽑힌 사람은 천황이라 부르지 않고 ‘통령(統領)’으로 부르자고도 했다. 큰 통령이면 ‘대통령’이 될 것이다.

민간 요구보다 후퇴한 ‘대일본제국헌법’

저널리스트 미야타케 가이코쓰가 1889년 반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을 풍자한 그림. 헌법을 하사하는 천황을 해골로 그려 헌법에 대한 불만을 표했다. 미야타케는 불경죄로 3년 반 수감 생활을 했다. 사진 출처 가와카미 무라사 통사편
자유민권운동의 열기에 놀란 메이지정부는 1881년 헌법 제정을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초안 작업에 착수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핵심은 이토 히로부미다. 결국 1889년 민간에서 요구한 것보다는 훨씬 보수화된 내용의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되었는데, 천황이 국민에 하사하는 형식의 흠정헌법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저널리스트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는 해골이 헌법을 하사하는 풍자화를 잡지에 그려 넣었다. 그는 비록 불경죄로 투옥되어 3년 반 정도 감옥에 있게 되었지만, 그 후라면 상상하기 힘든 자유민권운동가들의 ‘기개’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천황도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어쨌든 일본은 비서유럽 세계에서는 최초로 헌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의회를 개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 헌법은 패전 후 현행 일본국헌법이 새로 만들어질 때까지 한 글자의 수정 없이 유지되었고, 의회는 전쟁과 패전의 와중에서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폐쇄되는 일이 없었다.

이 약 20년간의 ‘초기 민주화운동’ 동안 다수결, 1인 1표제, 직접·대의민주주의 등 지금은 당연시되는 여러 제도의 타당성을 두고 뜨거운 논의가 진행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광복 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었고, 군부독재하에서는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성역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숭배만 했지, 사색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는 지금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실험을 했던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은 한 번쯤 되돌아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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