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해파랑길에서 다른 사람 되기
제약업계에서 오래 잔뼈가 굵은 친구가 있다. 대학과 군대까지 같은 곳을 뒹굴다 보니 쌓인 추억이 많다. 출중한 실력의 친구는 현역에서 물러나면 바로 해파랑길을 걷겠다고 자주 말했다. 술잔 앞에서의 약속이야 늘 있는 것, 설마 하는 심정도 보태면서 가볍게 추임새는 물론 함께하자고 했다. 달력 속의 그날이 거짓말처럼 실제로 오고 친구는 지난 만우절에 통일전망대에서 오륙도를 향하여 출발하겠다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소 몰고 장에 가는 이웃한테처럼,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시게, 하기에는 섞인 말들이 아교처럼 너무 딱 들러붙었다. 무엇보다도 나도 내심 꿈꾸던 길이 아닌가.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하는 것. 부산 종점까지 죽 내달리지는 못해도 주말에 몇 구간씩 길에 발목을 묻기로 했다.
국토의 등허리 같은 해안선은 그냥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따끔한 선분이다. 그 길은 삼국유사의 신화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장소이고, 최시형 신사께서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관군의 탄압과 추적을 따돌리면서 겨레의 사상인 동학을 온전히 지켜낸 도피로와 겹치는 곳이다. 여름철 벌거벗고 뛰어들거나 커피 한 잔 홀짝이며 저 수평선 너머를 난해한 표정으로 짐작하는 것도 우아한 동작이겠으나, 발바닥에서 통통 튀어오르는 생각을 너무나 생생한 현장과 결합하는 것도 벅차오르는 공부가 아닐 수 없었다.
마흔 무렵, 어제하고 똑같은 나날이면 그게 곧 지옥이다, 라는 문장에 혹했었다. 말은 그럴듯한데 불혹에서 이순까지 대부분 비슷한 날들의 연속이기가 쉽다. 밤에 더러 멀리 나아간다 해도 아침이면 같은 구두에 발을 집어넣어야 하는 게 또한 후줄근한 일상이다. 그러다가 도둑처럼 결정적인 고비는 온다. 정년과 은퇴라는 산맥을 넘고 남아도는 시간의 주인이 되어 발바닥을 바닷물에 담글 때, 아무 대책 없음을 알고 가슴은 더욱 텅 비는 것이다.
걷는 동안, 파도의 흰 거품과 내 허연 머리를 생각했다. 파도가 뭍을 만나 박살나듯 몸도 그 어떤 경계에 임박했다는 표지이겠다. 멀리 둥근 수평선이 열린 괄호라면 이제 등 뒤의 어둠은 닫히는 괄호처럼 생을 조여온다. 그사이 조금이나마 다른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친구는 부산행, 나는 서울행. 우리는 하조대에서 직각으로 잠깐 어긋났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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