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해파랑길에서 다른 사람 되기

기자 2023. 4. 2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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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업계에서 오래 잔뼈가 굵은 친구가 있다. 대학과 군대까지 같은 곳을 뒹굴다 보니 쌓인 추억이 많다. 출중한 실력의 친구는 현역에서 물러나면 바로 해파랑길을 걷겠다고 자주 말했다. 술잔 앞에서의 약속이야 늘 있는 것, 설마 하는 심정도 보태면서 가볍게 추임새는 물론 함께하자고 했다. 달력 속의 그날이 거짓말처럼 실제로 오고 친구는 지난 만우절에 통일전망대에서 오륙도를 향하여 출발하겠다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소 몰고 장에 가는 이웃한테처럼,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시게, 하기에는 섞인 말들이 아교처럼 너무 딱 들러붙었다. 무엇보다도 나도 내심 꿈꾸던 길이 아닌가.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하는 것. 부산 종점까지 죽 내달리지는 못해도 주말에 몇 구간씩 길에 발목을 묻기로 했다.

국토의 등허리 같은 해안선은 그냥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따끔한 선분이다. 그 길은 삼국유사의 신화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장소이고, 최시형 신사께서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관군의 탄압과 추적을 따돌리면서 겨레의 사상인 동학을 온전히 지켜낸 도피로와 겹치는 곳이다. 여름철 벌거벗고 뛰어들거나 커피 한 잔 홀짝이며 저 수평선 너머를 난해한 표정으로 짐작하는 것도 우아한 동작이겠으나, 발바닥에서 통통 튀어오르는 생각을 너무나 생생한 현장과 결합하는 것도 벅차오르는 공부가 아닐 수 없었다.

마흔 무렵, 어제하고 똑같은 나날이면 그게 곧 지옥이다, 라는 문장에 혹했었다. 말은 그럴듯한데 불혹에서 이순까지 대부분 비슷한 날들의 연속이기가 쉽다. 밤에 더러 멀리 나아간다 해도 아침이면 같은 구두에 발을 집어넣어야 하는 게 또한 후줄근한 일상이다. 그러다가 도둑처럼 결정적인 고비는 온다. 정년과 은퇴라는 산맥을 넘고 남아도는 시간의 주인이 되어 발바닥을 바닷물에 담글 때, 아무 대책 없음을 알고 가슴은 더욱 텅 비는 것이다.

걷는 동안, 파도의 흰 거품과 내 허연 머리를 생각했다. 파도가 뭍을 만나 박살나듯 몸도 그 어떤 경계에 임박했다는 표지이겠다. 멀리 둥근 수평선이 열린 괄호라면 이제 등 뒤의 어둠은 닫히는 괄호처럼 생을 조여온다. 그사이 조금이나마 다른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친구는 부산행, 나는 서울행. 우리는 하조대에서 직각으로 잠깐 어긋났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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