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길을 묻다] 선진경제 빛 속에 깃든 어둠…부의 편중 심화된 반민주공화국
솔직히 너무 하지 않은가
이제 한두 세대 내에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거의 완전히 막혀 있다.
그 빠른 발전의 성과를
함께 나누면서
발전을 할 수 없었던 걸까
해답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발전한 지난 시기 동안
우리의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다
지금까지와 같은 정책으로는
문제 해결은커녕
더 악화만 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빛과 어둠의 공존이 아니다
우리는 빛의 발전이 낳은
구조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들어 최절정의 기세가 약간 꺾이고는 있지만, 길게 볼 때 한국 경제는 오래도록 지속적인 초고속 발전과 번영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기술과 상품은 세계 공급망의 선두권에 서거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세계 어디를 가든 한국 물품이 없는 곳을 찾기란 힘들다. 해외여행 도중 아주 드물게 한국 상품이 보일 때마다 신기한 듯 눈길을 주곤 했던 경험은 어느덧 한 세대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한국의 어떤 기술력은 세계 경제에 심대한, 또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계의 해당 산업을 앞서 이끌고 좌우하기도 한다. 날로 심각해지는 미·중 대결의 한복판에 한국 반도체가 놓여 있다는 점만 보아도 한국의 한 산업, 한 기술, 한 상품, 한 기업이 크게는 국제질서와 패권경쟁, 그리고 작게는 세계 산업 흐름과 공급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경제는 약소국·중진국·중견국을 거쳐 이제는 선진국과 선도국을 말하는 단계에 진입해 있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발전 자체와 함께 전광석화와 같은 그 속도의 빠름에 있다. 즉 약소국 단계도, 중진국 단계도, 중견국 단계도 모두 매우 짧고 빠르게 통과했다는 점이다.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을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변경은 이 기구 설립 이후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 경제는 ‘원조경제’ 단계나 ‘후후발산업화’(late-late industrialization) 경로는 말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수입대체 산업화’나 ‘따라잡기 발전모델’이 아닐뿐더러 그것들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자주 언급되는 말로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자·반도체·배터리·스마트폰·바이오 헬스·미래 자동차·조선·해운·철강 산업의 기술과 경쟁력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이제 제조업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 중 최선두권이다. 국제특허 출원에서도 한국은 세계 선두권이다. 한국의 혁신지표나 디지털 지표들은 거의 항상 세계 최상위권이다. 주요 경제지표에서 한국의 앞에 서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분명하다. 수출과 무역은 그보다 더 앞선다. 군사력도 이제는 세계 6~7대 군사강국으로 평가받는다. 오래도록 국력을 평가하던 두 지표인 경제력과 군사력, 즉 전통적인 국가 평가의 핵심 기준인 부국강병에 관한 한 한국은 절대적으로 성공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부국도 강병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은 추호도 의심할 수 없다. 불과 두 세대 전 한국은 가난에 허덕이고 원조를 받는 나라였으나, 이제 주요 7개국(G7)에 초청받는 것은 익숙하며 선진국으로 불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고속 성장과 고속 불평등 병진
지표상 어느 부분은 G7의 일부 나라들을 종종 제치기도 한다. 이를테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 또는 구매력 기준 1인당 GDP의 경우가 그러하다. 모두 한국의 놀라운 경제 발전 덕분이다. 한 나라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이토록 빨리, 이렇게 지속적으로 발전한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특별히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러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에 한국은 자랑할 만한 역사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민주주의를 통해 선진국 대열에 성큼 합류한 사례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말 빛의 속도로 발전한 것이다. 오늘의 인류 가능성을 보려면 한국 사회를 보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경제는 빛의 밝기만큼이나 어둠도 깊다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두 개의 현실, 두 개의 한국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고속 성장의 이면에 고속 불평등이 놓여 있음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고속 성장과 고속 불평등의 병진을 말한다. 한국 사회는 초고속 발전과 함께 거시적으로 사회의 거의 전 영역, 전 부문, 전 세대, 전 계층, 전 지역에 걸쳐 불평등이 악화되어 왔다.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소득불평등은 개선되지 않았다. 개선되기는커녕 더 나빠졌다. 소득분위별 가구당 가계수지를 보면 하위 계층의 소득은 거의 증가하지 않거나 약간만 증가하였음에 비해 상위 계층은 막대한 폭으로 증가해 왔다. 부자들의 소득은 더욱 늘어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은 거의 늘어나지 않거나 더 줄어드는 소득불평등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번영의 한 객관적 단면이자 속살인 것이다.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한 중요한 요인은 임금소득의 차이다. 주지하듯 한 사회의 경제가 성장을 하게 되면 단지 상층 부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부는 함께 증가한다. 그것이 곧 발전과 성장의 의미다. 그러나 빠른 발전·성장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부자와 빈자의 격차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때 증가는 곧 분배의 악화를 의미한다. 고소득층에의 소득 집중은 놀라울 정도인 것이다.
한국 사회의 상위 0.1%, 1%, 10%의 임금소득은 재빠르게 증가해 왔다. 소득 상위 0.1%가 전체 개인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6년, 1997년(외환위기 직전), 2021년 각각 2.39%, 2.17%, 5.85%를 기록하였다. 1976년에서 1997년까지 20년 동안 거의 차이가 없거나 약간 개선되던 수치는 2007년에 처음 5%를 넘긴 이후 2021년에는 1976년의 거의 2.5배에 달하고 있다. 같은 시기 소득 상위 0.5%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5.52%, 5.30%, 9.38%로 증가하였다. 상위 0.1%의 소득점유율과 유사한 양상으로, 2007년 처음 6%를 돌파한 이후 이제는 10%에 근접하고 있다. 같은 시기 상위 1%의 경우 각각 7.88%, 7.76%, 11.70%로 증가하고, 상위 5%는 각각 17.73%, 20.22%, 25.08%로 증가하였다. 번영의 속도 못지않게 부의 집중과 불평등이 악화되었음이 확연하다. 다른 말로 하여 소득의 상위 계층 집중과 하위 계층 감소가 함께해왔음을 알 수 있다.
임금·자산 불평등이 중요한 요인
실제로 월평균 근로소득의 추이를 보면 악화의 심각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소득 10분위별 가구당 가계수지의 2003년과 2022년의 ‘전체 평균’ ‘1분위’ ‘10분위’를 각각 보면 놀랄 만한 수치가 나온다. 전체 평균(2인 이상) 근로소득은 2003년 170만7657원에서 2022년 390만9167원으로 2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나 1분위는 같은 기간 19만6814원에서 28만2592원으로 44%가량 증가하였다. 절대 액수도 아주 미미하다. 반면 10분위는 413만6106원에서 1012만1081원으로 2.5배 늘었고 절대 액수도 막대하게 증가하였다. 증가 비율 자체가 1분위의 5배에 달한다. 근로소득 격차가 비율과 액수 면에서 기록적으로 확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2인 이상이 아니라 1인 이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격차는 더욱더 벌어진다. 전체 평균, 1분위, 10분위가 2022년 현재 각각 312만910원, 9만4887원, 883만3642원(이전소득은 추후 논의)이다. 월평균 근로소득이 10분위는 1분위의 거의 100배에 육박하는 것이다. 성장과 발전의 과실은 명백히 부익부 빈익빈, 다익다 소익소(多益多 少益少)로 귀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흐름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즉 더욱 나빠지고 있다.
그리하여 2021년 기준 OECD 내에서 한국보다 1인당 GDP가 높으면서 상위 1% 소득점유율이 더 높은 국가는 이스라엘, 미국 두 나라밖에 없다. 상위 1%의 소득점유율이 최상위권인 칠레·멕시코·튀르키예·콜롬비아·코스타리카는 OECD 내에서도 1인당 GDP가 가장 낮은 국가군이다. 즉 OECD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못사는 나라들이다. 따라서 적어도 (한국이 속한 잘사는) OECD 국가들을 기준으로 살펴볼 때는 불평등한 국가들이 평등한 국가들보다 더 잘살지 못한다는 점이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살펴본다).
공화국의 공동복리 의미 되새길 때
자산의 불평등 역시 계속 악화되어 왔다. 실제로 가계소득의 중간값 대비 평균값보다 가계자산의 중간값 대비 평균값은 불평등이 훨씬 더 심각하다(물론 가계자산 불평등도의 경우 한국은 OECD 평균보다는 나은 상태이기는 하다). 실제 소유 현황을 보면 매우 심각하다는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한민국 국토의 총 70%를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현실에서 소득 상위 10%(10분위)가 77.2%를 차지하고 있으며 상위 20%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80% 국민들은 민간 소유의 10%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가계자산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토지와 주택을 중심으로 하는 부동산 자산인데 이 정도의 극심한 불평등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불평등(지니계수)은 총자산 0.5836, 금융자산 0.6402, 실물자산 0.6491, 부동산자산 0.6655, 거주주택자산 0.6684에 달한다(국토연구원, 2020/2021). 같은 해(2020) 한국의 처분가능소득 기준 불평등(지니계수)이 비록 스웨덴(0.276)·캐나다(0.280) 보다는 높으나 미국(0.378)·영국(0.355)보다는 낮은 수준(0.331)이라고 해도, 부동산 불평등지수(0.6655)는 무려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부동산 불평등은 최악이다. 소득 차이는 즉각 더 크고 더 긴 주거 차이로 연결된다. 최저임금의 약간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해 최저임금으로 서울에서 중위가격 아파트를 구매하는 데는 학업 이후 한 사람의 생애 모든 기간(2017년 37년, 2020년 43년)이 걸리게 되었다. 소득분위별 서울 중위가격 아파트 구매 소요 기간을 보면, 1분위는 72년, 5분위는 10년이 걸린다(경실련, 2020). 1분위와 5분위가 무려 62년의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1분위의 경우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두 번이나 살아도 서울 중위가격 아파트 한 채를 사지 못한다는 비극적인 얘기가 된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인간 생활의 3요소, 또는 3필수요소라고 배우는 ‘의식주’의 하나인 집 문제에 대해, 미래의 청년들과 태어날 세대에게 우리는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소득 하위 10%에 속하는 가구가 평균소득 가구로 이동하는 데는 무려 다섯 세대의 기나긴 기간이 필요하다. 이는 오랜 시간 발전해온 OECD 국가들의 평균보다도 더 길다. 국가의 번영과 발전은 곧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기회의 창출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한국의 이 지표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직히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자랑해온 하나의 인간공동체로서 말이다. 국가의 빠른 번영의 과실의 누적에 맞추어, 삶의 수준과 부의 심각한 편중 및 고착 현상도 마찬가지로 빠른 시간 내에 난공불락으로 견고해진 것이다. 즉 너무 나빠진 것이다.
이제 한두 세대 내에는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거의 완전히 막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빠른 발전의 성과를 함께 나누면서 발전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해답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즉 길이 있다. 그럼에도 경제가 계속 발전한 지난 시기 동안 우리의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온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은 정책으로는 이 문제는 해결은커녕 더 악화만 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빛과 어둠의 불가피한 공존이 결코 아니다. 즉 우리의 오늘의 현실은 빛을 위한 당연한 어둠이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찬찬히 안을 들여다보면 찬란한 빛이 낳은 짙은 어둠이라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빛 속에 어둠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이제 빛의 발전이 낳은 구조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에 들어와 인류가 처음 공화국을 불러올 때의 이름은 ‘common wealth’였다. 그것은 ‘재화’와 ‘행복’을 포함하여 귀족과 평민, 주인과 노예, 부자와 빈자가 모두 함께 복리를 누리는, 요컨대 ‘공동 복리’를 뜻했다. 본래 의미와 지혜 역시 같았다. 절정의 선진을 구가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며 우리는 지금 그 이름값의 내실을 엄히 따져 묻게 된다.
박명림 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박명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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