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조각 된 미술사, 다시 시작된 미술사[정하윤의 아트차이나]<29>
혁명적 미술가 꿈꿨으나 교사 발령나자
고향 샤먼 본거지, '샤먼다다' 운동 주창
기존 제도·관습 부정, 획기적 작품 발표
중·서양미술사 책 두권 세탁기 돌리기도
톈안먼사태 이후 佛서 머물며 작품활동
동서양문화, 하나로 혼재한 작품들 발표
[정하윤 미술평론가] 혹시 세탁기에서 흐물흐물 찢어진 종이조각을 발견한 적 있는가. 바지 주머니에서 미처 못 꺼냈던 영수증 같은 것 말이다. 축 젖은 채 갈기갈기 찢긴 종이를 보며 난감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황융핑(1954~2019)의 이 작품도 낯설지 않을 거다. 그의 대표작, 이름도 길고 긴 ‘중국회화사와 서양예술약사(簡史)를 세탁기에 2분간 돌리다’(1987) 말이다.
제목에서 친절히 설명하듯, 이 작품은 두 권의 책을 세탁기에 넣고 2분간 돌린 것이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인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 작업이 2017년 국제예술품감정위원회(ICEWA)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현·당대 예술작품 10점’에 선정되기도 했다는 사실. 누군가 그만큼 큰 값을 치르고 구매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세탁기에 들어갔다가 나온 종이 쪼가리들이 왜 그리 비싸단 말인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으니 한 번 내막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일단 이 황당무계한 작품을 만든 미술가 황융핑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다. 그는 1954년 샤먼이란 동네에서 태어나 마오쩌둥의 중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마오의 시대 동안 굳게 닫혔던 대학의 문이 다시 열렸던 1977년, 황융핑은 그 길로 저장미술학원에 입학해 유화를 전공했다. 당시 중국의 미술대학은 여전히 소련식 사실적인 그림을 가르쳤지만, 황융핑은 그밖의 미술에 대해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던 서양미술 개론서나 미술잡지 등을 통해 습득했다. 그리고 이 모두는 범상치 않은 그의 졸업작품에서 빛을 발했다. 마오의 시대부터 인기주제였던 공장 노동자를 다루긴 했지만, 붓과 물감이 아닌 공업용 스프레이를 이용한 것이다. 매체의 변화를 통해 전통적인 방식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던 거다. 황융핑은 이때부터 도전과 혁신의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미술그룹 평가
그런데 웬걸. 중국 정부는 이렇게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청년을 고향 샤먼의 중학교 교사로 발령했다(그 무렵 중국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나라에서 직업을 배정해줬다). 혁명적인 미술가를 꿈꾸던 청년에게 교사가 웬말인가. 그것도 미술의 변방 샤먼에서! 이 사건은 황융핑의 반항심을 제대로 자극했고, 그는 1986년 ‘샤먼다다’ 운동을 주창하며 기존 제도와 관습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샤먼지역의 다다’라는 그룹 이름 그대로 황융핑의 고향인 샤먼을 본거지로 삼아 마르셀 뒤샹(1887∼1968) 등이 1910년대 시작했던 반예술운동 ‘다다이즘’을 표방했다.
1980년대 중국에서 우후죽순 생긴 여러 미술 단체 중 가장 급진적인 그룹으로 평가하는 샤먼다다의 멤버들은 그 명성답게 가히 획기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예를 들면 이전에 그린 모든 회화작품을 가져와 불태우는 작업. 황융핑은 이전 작품에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술가에게 작품은 일반인에겐 아편과 같다. 예술이 파괴되기 전에는 삶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뭣이라? 예술이 파괴되어야 한다고? 예술가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술’은 예술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과거·기존·전통의 예술을 말하는 거다. 그렇게 말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게도 된다. 다다이스트들이 전통적인 예술을 거부했던 것처럼 황융핑 또한 예술 그 자체보다는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옛 예술을 부정했던 거다. 이런 혁명적인 미술가가 황융핑이었다.
제작자를 알았으니 이제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중국회화사와 서양예술약사를 세탁기에 2분간 돌리다’를 위해 황융핑은 저장아카데미의 미술사 교수였던 왕보닌이 쓴 ‘중국회화사’와 허버트 리드가 쓴 ‘서양미술사’의 번역본을 넣었다. 명실공히 중국과 서양의 미술사를 대표하는 책 두 권을 세탁기에 돌려 모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거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가장 먼저는 이전의 미술, 그러니까 미술의 역사를 몽땅 부정하겠다는 거다. 황융핑의 일관된 주제인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거부’란 점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이다. 또 다르게는 중국이나 서양 그 어디에도 없던 예술을 하겠단 야망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해 말하자면, 이는 그 무렵 중국의 문화적 홍수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중반은 그야말로 중국에서 ‘문화 열기’가 가득했던 때다. 마오의 시대 동안 금지됐던 서양의 미술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동시에 역시 접근이 불가능했던 중국의 전통미술에 대한 빗장도 풀린 터였다.
서양의 근현대 철학가들의 번역서와 도가·유가·불교에 대한 서적도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왔다(황융핑은 피에르 카반느이 쓴 ‘마르셀 뒤샹과의 대화’를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마오쩌둥 어록 외에는 어떤 것도 자유로이 읽을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황융핑 같은 젊은이들은 이 모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황융핑이 중국과 서양의 미술사 책을 한방에 세탁기로 버무린 것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의 문화 모두를 한꺼번에 흡수하려 했던 시대에 대한 묘사인 거다.
‘중국계 프랑스 미술가’로 활동하다 눈감아
그런데 사실 황융핑의 이 작품은 서구의 현대미술사를 기준으로 보면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존의 미술을 전복시키겠다는 목표나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재료로 사용하는 방식 모두 서구미술에서는 이미 오래된 것이니까. 하지만 ‘더 늦었기 때문’에 ‘가치가 덜하다’는 공식은 성립할 수 없다. 각 지역마다 특수한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 또한 그만의 독특한 상황이 있었다. 이전 미술을 부정하는 것은 감히 마오의 시대에선 할 수 없었다. 그 살벌한 시대를 겪은 후에야 전복이나 혁신을 논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황융핑이 세탁기에 책을 돌려버린 1980년대였다. 중국에서는 이때야말로 기존의 미술을 부정하는 적기였고, 그 혁명의 신호탄을 강렬하게 쏘아올린 자가 황융핑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황융핑의 작품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샤먼다다가 뒤샹의 다다보다 반세기 이상 늦었더라도 말이다. 그 의미를 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빨래 작품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10대 작품에 드는 것에 수긍 못할 이유도 없다.
아방가르드 미술가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황융핑은 서른다섯 살이던 1989년, 전시를 계기로 프랑스로 건너가 그 길로 정착해 버렸다. 아무래도 그가 파리에 머물 때 터진 톈안먼사태를 보며 귀국하지 않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황융핑은 도교나 불교 철학에 집중한 작품을 펼치기도 하고, 스케일이 훨씬 더 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다다적인 면을 갖고 있는 작품이 많다. 예를 들면 ‘관음의 100개의 팔’(1997). 철제로 된 구조물에 마네킹의 팔 100개가 달린 이 작품은 뒤샹이 제작한 ‘병걸이’(1914)의 패러디이자 동서양 문화가 하나로 혼재된 작품이기도 하다. 사는 지역이 달라졌고, 국제적인 명성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갔을 때지만 중국과 서양의 미술사 책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던 때의 핵심은 여전하다. 이후 황융핑은 1999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프랑스관 대표작가로 선정되기도 하며 ‘중국계 프랑스 미술가’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2019년 눈을 감았다. 거성의 죽음은 중국미술사의 한 챕터가 닫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서양의 미술사는 모든 것을 부정했던 다다 이후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초현실주의로 이어졌다. 기존 예술을 부정했던 황용핑 이후, 중국의 미술가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갈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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