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회피 말고 위기를 주시하라[전문가의 세계 - 박승일의 영화X기술]
지구 향해 날아오는 ‘에베레스트’ 크기의 혜성…멸망위기에도 대통령은 중간선거에만, 언론은 연예인 이별소식에만 집중한다
세계 최대 IT·우주 기업 CEO는 지구로 안착시켜 희귀 자원 채굴하자고 주장…지구 파괴 혜성을 140조달러 가치 지닌 보물이라고 믿는 ‘탈진실’ 상황
탐욕자본주의·기술낙관주의가 ‘현재의 위기’를 부정하는 세상…최소한의 합의를 이끌기 위한 올바른 ‘개입’을 고민해야 할 때다
“결국에 세상은 망하고 우린 모두 죽고 말겠지. 수많은 고통과 기쁨도 한 줌의 가루가 되겠지. 뭐가 됐든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그러니 괜찮아.” 가수 천진우는 ‘멸망’이라는 곡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세상은 망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죽는 것이기에, 그러니 괜찮다고. 하긴 그렇다. 내가 죽는 일인칭의 죽음은 남아 있는 자들의 슬픔이고 네가 죽는 이인칭의 죽음은 그걸 지켜보는 나의 슬픔이겠지만, 우리 모두의 죽음은 남아서 슬퍼할 이가 없다는 점에서 차라리 괜찮아보이기까지 한다. 슬퍼할 주체가 없다면 슬픔이라는 감정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 <돈룩업> 또한 인류의 멸망을 다루지만 마찬가지로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스스로 멸망을 초래한 인류의 어리석음을 끝까지 비웃으면서, 그 거대한 죽음 앞에서 쓸데없이 감상적이기보다는 되레 멸망이라는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어쩌겠는가. 인류가 초래한 결과인 것을. 영화의 그 극단적인 결과 앞에서 우리가 현재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멸망이 아니겠는가.
대환장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 <돈룩업>은 여러모로 감정 소모가 큰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고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영화는 블랙코미디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 코드를 잔뜩 담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 영화가 새삼 진지한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왔다. 영화적 상상력을 많이 버무리긴 했지만 말이다. 일단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천문학과 박사 과정생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런스)와 그녀의 지도 교수 민디(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에베레스트 크기만 한 혜성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바로 보고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하지만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만난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리프)의 반응은 “기다리면서 상황을 지켜봅시다”가 전부였다. 인류 멸망보다는 당장의 중간선거와 대법관 지명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실망한 이들은 언론을 통해 위험을 알리려 하지만, 언론 또한 유명 연예인의 이별 소식에만 호들갑을 떨 뿐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장의 시청률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참다못한 디비아스키는 “우리 모두 100% 다 죽는다고요!”라고 소리치면서 자리를 박찬다.
방송 후에 나타난 여론의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대중은 연예인의 바람과 재결합 소식에는 한껏 열광하면서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퍼다나르지만, 정작 혜성 충돌이라는 엄청난 소식에는 디비아스키의 화난 얼굴을 각종 밈으로 만들어 조롱하는 식으로 가볍게 반응해버리고 만다. 이쯤 되면 정치와 언론의 저 어이없는 반응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데, 정치와 언론의 수준은 곧 대중의 수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영화는 이 모두가 서로를 근거로 삼아 무한퇴행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는 대중을 기만하고 언론은 정치에 기생하며 대중은 쾌락을 좇는다. 그리고 대중은 다시 그런 정치가 가능한 토양을 만든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러한 퇴행적 상황은 예외가 아닌 정상으로 자리 잡아간다. 모두가 비정상인 상황이 도리어 정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영화였던가? 혹 현실은 아닌가?
그러던 와중에 올린 대통령은 다시 민디와 디비아스키를 백악관에 불러들여 혜성 충돌에 대한 대책 마련을 제안한다. 드디어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은 것일까? 물론 아니다. 각종 스캔들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반전 카드로 혜성 충돌이라는 급박한 위기를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핵폭탄을 실은 위성을 발사해 혜성의 궤도를 바꿈으로써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구하려는 계획 때문이다. 드디어 디데이, 핵폭탄을 실은 20여기의 위성이 발사에 성공해 우주로 날아가던 도중, 갑자기 그 모든 계획이 취소되고 급기야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일이 발생한다. 언론도 국민도 심지어 실무자도 영문을 모르는 상황, 대환장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탈진실의 시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정은 이렇다. 세계 최대 IT·우주 기업의 CEO인 이셔웰(마크 라이런스)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혜성에 엄청난 양의 희귀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궤도를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잘게 부숴서 지구에 연착륙시켜야 한다는 그야말로 대담한 주장을 내놓는다. 최첨단 탐사 채취 드론을 보내 나노 기술로 표면을 정밀 스캔하고 양자 분열 폭탄을 사용해 폭파하면 혜성 전체를 정확하게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혜성에 매장된 대량의 자원을 채굴함으로써 자원 희소성 문제로부터 비롯된 가난과 불평등, 기후위기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부가가치와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 다시 한번 인류 역사에 황금기를 열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게 핵폭탄 탑재 위성을 귀환시킨 이유였다(!). 이제 혜성은 행성 파괴자가 아닌 140조달러의 경제적 가치를 가져다주는 보물로 일컬어지기에 이른다. 물론 이 주장이 ‘개소리(bullshit)’라는 것은 누구든 단박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미국 대통령이 지지하고 최첨단 기업의 CEO가 실행하고 노벨상 수상자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면, 놀랍게도 그것은 현실적인 힘을 갖는다.
현실적인 힘이란 아마도 이런 것일 터이다. 정부기관은 대통령의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타당성 조사에 돌입해 혜성이 얼마만큼의 이익을 가져올지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을 통해 혜성 충돌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성장에 기여한다는 식으로 어젠다를 새롭게 설정한다. 여기에 동원된 전문가들은 온갖 지식과 이론을 통해 이런 주장에 객관적인 근거를 마련해준다. 소셜미디어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무한정 실어나르면서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관심 자체를 희석시켜버린다. 혜성 관련 기업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이에 대중은 혜성 따위는 잊은 채 각종 투자 열풍에 휩싸인다. 기업은 기업대로 혜성 충돌 메타버스니 하는 상품을 개발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학교는 학교대로 우주 교육이니 하는 교과 과정을 개발해서 시대적 흐름을 뒤쫓는다. 혜성 충돌과 인류 멸망이라는 ‘사소한’ 진실만 빠졌을 뿐, 세상은 어제와 똑같이, 아니 더없이 진지하고 분주하게 내일을 향해 내달려간다. 그래서 ‘돈룩업’이다.
영화는 혜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지 말자고 외치는 ‘돈룩업(Don’t Look Up)’파와 반대로 하늘 위 혜성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룩업(Look Up)’파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이들은 혜성 충돌에 대한 대책 마련의 시급성과 그 실효성을 두고 다투는 게 아니다. 혜성 충돌이라는 엄연한 사실 그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고 싸움의 대상이다. 무한퇴행은 투쟁의 영역마저도 뒤로 후퇴시켜버린다. 영화의 혜성 충돌을 지금 여기의 기후위기로 바꾸어도 상황은 동일하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심지어 정치적 입장과 신념에 따라 진리 그 자체를 선별하고 수정할 수 있다고 보는, 이른바 ‘탈진실(Post Truth)’의 상황이 이렇듯 영화와 현실을 하나로 교직한다. 혜성 충돌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마저도 탈진실로 받아들이는 상황 속에서 민디는 이렇게 일갈한다. “우리끼리 그런 최소한의 합의도 못하고 처앉아 있으면,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런데 이게 정말 영화였나? 현실이 아니란 말인가?
텅 빈 기표로서의 개입주의는 허망하다
나는 지금까지의 칼럼에서 줄곧 기술 최대주의 또는 기술 가속주의를 비판해왔다. 기술 최대주의는 마치 불타는 집 앞에서 미래의 기술이 언젠가 그 불을 꺼주길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물론 영화 <돈룩업>에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혜성에 매장된 희귀 자원을 채굴해서 부를 창출하겠다는 주장에는, 당장의 위기보다 미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탐욕적 자본주의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의 기술적 낙관주의가 더없는 아군의 형태로 함께 녹아들어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 자본과 기술이 인류를 구원해준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저 주장이 ‘개소리’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든 이 주장을 쉽게 거부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 위기가 혜성 충돌이 아니라 지구온난화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심지어 계속해서 혜성 충돌을 경고해왔던 민디마저도 권력과 돈의 압도적인 힘에 홀려 잠시나마 기술 최대주의의 해법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현실을 지배하는 실제적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솔직해져 보자. 다시 묻는 이유는 하나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 스스로가 답변에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칼럼들에서 나는 기술 최대주의를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작지만 단단한 방식의 개입주의를 주장했다. 개입주의는 말 그대로 지금 여기의 현실에 전략적으로 개입하면서 그 현실을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 최대주의나 기술 최소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해법을 경계하는 한편, 그사이에 넓게 펼쳐진 현실의 영역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명한 실천을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기술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절차를 마련하고 윤리적인 기술 발전을 촉구하며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모색해나가는 식이다. 상식적인 제안이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탈진실 상황을 상정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문제는 개입주의가 적어도 지금이 절박한 위기의 상황이고 우리가 여기에 개입해 이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기반으로 할 때에야 비로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살인 병기 터미네이터가 우리의 친구라고 주장하거나 혜성 충돌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회라고 주장한다면, 그리고 지구온난화는 거짓이며 미래 기술이 얼마든지 기후위기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심지어 이런 주장과 신념이 현실적인 힘을 가진 사회라면, 개입주의는 그 상식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런 상황 속에서 개입주의는 오히려 검증되지 않은 온갖 신념과 감정을 합리화해주는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공통의 합의 체계를 근본에서부터 침식해나갈지도 모른다. 개입주의가 역으로 개입 불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판은 개입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행해져야 한다. 기술 최대주의의 맹목성을 경계하는 만큼이나 텅 빈 기표로서의 개입주의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적확한 비판을 제기해야 한다. 개입주의는 현재적 개입의 필요성만을 말할 뿐 그 내용과 방향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충실히 개입해나가야 한다는 게으른 주장만 되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사라진 사회에서 어떻게 최소한의 합의를 이끌어낼지, 그 위에서 어떻게 거대한 탈진실과 맞서면서 더 올바른 방향으로서의 개입을 추구해나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비민주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목소리들이 저마다의 주장을 늘어놓는 반지성적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저항해나가야 하며, 이 가운데 개입 그 자체의 내용과 방향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자기 비판을 해나가야 한다. 즉 개입에 대한 개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그리듯 우리들 저마다의 개입은 멸망을 앞두고 펼치는 한바탕 난리가 되고 말 것이다.
멸망이 오기 전에
아마도 최후의 만찬이 그랬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서 잔을 채우고 빵을 나누고 기도를 했을 것이다. 서로 웃고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영화는 인류의 마지막 식사 장면을 그렇게 묘사한다. 멸망의 아비규환 대신, 여기에는 그릇을 건네는 따뜻한 손길과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눈빛과 마지막을 함께하는 안도가 있다.
천진우의 노랫말처럼, 고통도 기쁨도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도리어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멸망 따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사 마지막에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못하고선 이제 와서 왜”라는 한마디 탄식을 덧붙인다. 그럼으로써 멸망이라는 상황에 대한 최후의 반성을 촉구한다. 멸망이 오기 전에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눈물 흘리지 말고, 그 전에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 소통하고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진실을 찾아나서야 했다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쓸데없이 감상적이기보다는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현실에 끊임없이, 그러나 올바르게 개입할 것을 부단히 요구한다. 멸망을 슬퍼하기보다 멸망의 상황이 오지 않게 최선을 다해 개입해나가라고 말한다. 똑바로 하늘을 보라고 말한다. 룩업!
▶박승일
캣츠랩(CATS Lab) 소장이자 기술문화연구자. 공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아울러 인문학도 공부하고 있다.
정직한 공부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기계, 권력,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박승일 캣츠랩 소장·기술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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