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관극장, 그 자체로 훌륭한 문화콘텐츠다
“문화자산 부수고 주차장이 웬 말이냐!”
“아카데미극장 철거계획 철회하라!”
“원주에서 초·중·고를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시민은 “30살에 타지에 나아가 30년을 살고, 60살이 되어 돌아왔다”며 “수많은 이들의 소중한 추억이 쌓여 있는 곳을 없애고 주차장을 지으려는 당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말하려고 하면 눈물부터 난다”는 30대 주부는 “엄마 아빠 손잡고 처음 갔던 극장이고 내 아이도 데려가고픈 곳인데, 애 키우는 내가 왜 이리 상처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아카데미극장에서 ‘해리포터’를 봤는데, 그 기억을 통째로 날리려 하느냐”고 따지는 열여덟 살 당찬 여고 2년생도 나왔다.
“대구 출신이지만, 원주에서 22년째 거주 중”이라며 마이크를 잡은 50대 남성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원주시민이기 때문에 나서서 지키려는 것”이라고 외쳤다.
앞서, 지난 11일 원강수 원주시장은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아카데미극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주차장과 야외 공연장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원주시는 지난해 2월 아카데미극장 부지 매입을 완료했고,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돼 국비 15억원, 도비 4억5000만원을 확보해 극장을 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민선 8기는 지난해 7월 돌연 극장 철거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카데미극장 보존을 위한 시민 모임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시정토론을 요구하며 피켓 시위에 나서자, 원 시장은 비공개 면담을 제안했다. 이 자리에서 원 시장은 ‘여기 원주분들이 있는가’, ‘나이가 몇 살인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 있는가’ 등을 묻고, “검토해보겠다”며 30분간의 면담을 마친 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철거를 발표했다.
이주성 ‘아카데미의 친구들’ 수호대장은 “담당자들이 문화자산의 가치를 모른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며 “대통령도 스스로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라며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에 나서는데, 왜 원 시장만 거꾸로 철지난 개발경제 논리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1963년 개관한 원주아카데미극장은 올해 환갑이다. 단지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원주시 근현대건축을 대표하면서 ‘1960년대 한국 극장건축에서 모더니즘의 미학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유지한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상영관에서 초등학교 졸업식이 열리는 등 극장을 넘어 마을의 커뮤니티 공간으로도 존재해왔다. 원주 사람들에게는 역사와 추억이 자리한 장소이자 새로 터를 잡은 이들에게도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2005년 복합상영관 시대가 열리면서 아카데미극장은 폐관된 채 방치됐으나 2016년 보존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원주도시재생연구회와 원주영상미디어센터가 ‘아카데미 살리기’ 프로젝트를 펼쳤다. 2020년 8월 ‘안녕 아카데미’ 행사를 시작으로 14년 만에 극장 문을 열었다. ‘아카데미의 친구들’ 회원들이 내부를 청소하고, 극장을 배움과 만남, 놀이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2021년 시민들은 ‘아카데미 구하기 100인 100석’ 모금에 나서 2주 만에 1억원을 모았다. 2차 시민모금 ‘아카데미 3650’도 3650명이 모이기 전 목표 금액을 채웠다. 지난해 1월 원주시가 극장을 매입하면서 시사회, 시민교육뿐 아니라 ‘아카데미 원탁회의 100인토크’, ‘시민상상워크숍’ 등을 열어 중앙동 상인, 장년층, 문화예술가들과 극장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올 3월, 민선 8기 원주시는 아카데미극장이 구조안전위험시설물이라며 극장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오래된 단관극장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문화콘텐츠다.
“해외 영화제에 가면 100년 넘은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신수원 감독은 “그같은 공간을 가졌다는 게 부럽다”며 “우리에겐 광주극장이나 원주아카데미극장 정도가 남아 있는데 60년 건물을 부수고 차 20대를 댈 주차장을 만든다니 암담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원주 아카데미극장 주변에는 맛집들이 즐비하고 재래시장과 개천, 그리고 넓은 주차장 후보지가 이미 있다. KTX가 다닐 만큼 교통 인프라도 갖췄다. 그는 “추억팔이 때문에 극장을 보존하자는 게 아니다”며 “원주가 지닌 좋은 자원을 활용하면 오히려 숨죽은 구도심을 더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다”고 제언했다.
“극장은 문화공간이자 이야기의 공간”이라는 이명세 감독은 “오래된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있다”고 입을 뗀다. “누군가는 거기서 연애를 했을 거고 누군가는 고달픈 날 위로받았을 거다. 오래된 문화공간이야말로 세대를 넘어 교류할 수 있는 매개체다. 이 사연 많은 극장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건 문화콘텐츠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 아닌가.”
대한민국 영화의 위상은 이미 세계적이다. 칸, 베니스, 베를린 세계3대 영화제 석권에 이어 아카데미상도 거머쥐었다. 이제 그에 걸맞게, 몇 곳 안 남은 오래된 단관극장도 보존할 줄 알아야 한다.
고재서(68) 대표는 그야말로 영화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단관극장을 지켜내고 있다. 가장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며 고통을 감내한다.
가업을 이어 스무 살 무렵부터 극장일을 해 온 그는 1993년 내부를 개조했다. 건물은 옛것 그대로 둔 채, 관객들이 쾌적한 상태로 관람할 수 있도록 좌석을 배려했다. 스크린 아래 무대를 뜯어내고 푹신한 소파를 깔았다. 음향 설비는 돌비시스템으로 교체했다. 자리를 50석 줄이면서까지 앞뒤 객석 간격을 벌렸다. 덕분에 ‘발 뻗고 영화를 보는 극장’이 되었다. 특히 2층 1열은 다리를 쭉 뻗어 올릴 수 있는 보조받침대를 설치했다. 휴대폰 충전도 가능하다. 당시로는 발빠르게 앞서가는 개선이었다.
입구는 작지만 필름 영사기를 가져다 둔 로비는 마치 작은 영화박물관처럼 꾸몄다. 상영관에 들어서면 300석 규모의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상영작은 ‘킬링로맨스’ 등 최신 개봉작들이다.
옛날 영화관의 복고풍 감성을 고수한 덕분에 여기서 드라마 ‘시그널’과 ‘응답하라 1988’의 극장 신을 찍어갔다.
“코로나19 때도 어려웠지만 사실 지금이 가장 심하다. 집 안에 머무는 동안 대형 모니터를 설치하고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영화를 보는 환경이 자리 잡았다. 동광극장은 이미 명소로 알려져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러나 영화는 안 보고 사진만 찍고 간다.”
그래도 고 대표는 극장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상영시간은 관객과의 약속인지라 설령 오지 않아도 문을 열어두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명소’이니 끝까지 이를 지켜달라고 개인에게 맡겨놓기엔 이제 너무 버거운 일이 되었다. 개인 사업자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무책임하다. 동광극장은 주변 식당가나 인근 외국인관광특구 등에도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해당 정부 기관과 자치단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시도기념물로 지정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동두천의 역사이자 대한민국 극장사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가 부각되는 이유는 경제적 가치에 있다. 고부가가치의 원천이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영화와 같은 문화콘텐츠가 더욱 주목받는다. 확실한 미래산업이자 전략산업이다. “21세기는 문화산업에서 각국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최후 승부처가 바로 문화산업이다”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이 크게 들린다.
원주, 동두천=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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