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숍.org’ 십자군 아래 뭉친 동네서점… ‘아마존 제국’서 살아남았다
1994년 시애틀의 한 창고에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창업에 나선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분야는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인터넷 서점. 초기 경쟁자들이 많은 시장에서 그는 편집자와 작가를 뽑아 고객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주는 글을 쓰게 합니다. 고객들의 전화 대기 시간을 1분 이내로 줄이면서 ‘편의성’을 앞세운 이 서점은 순식간에 경쟁 업체들을 무너뜨리고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The world’s largest bookstore)’이라는 별칭을 가진 인터넷 서점 ‘아마존(Amazon)’의 전신 ‘괴물 책방(Monster bookstore)’과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얘기입니다.
베이조스는 인터넷 서점의 성공 이후에 유통·물류·식료품·디지털콘텐츠·미디어·의약품·우주개발까지 진출하는 분야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아마존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아마존이 아닙니다. 거대한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남은 작은 책방들의 얘기입니다. 미국의 거대 유통 업체들조차 맞서지 못했던 아마존의 무차별적인 공습 속에 이들은 어떻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동네 서점의 십자군이 된 남자
이 성공 스토리의 시작에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앤디 헌터라는 출판업 종사자입니다. 그는 2018년 미국서점협회의 한 이사와 만난 자리에서 동네 서점들이 아마존과 같은 대형 인터넷 서점으로 인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전해 듣습니다. 당시 서점협회는 블로거와 기자들이 책을 인용하거나 리뷰할 때 아마존 대신 다른 독립 서점의 사이트로 연결하는 링크를 제공하는 ‘인디바운드(IndieBound)’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은 대실패였습니다. 헌터는 며칠 뒤 인터넷 서점의 온라인 구매 물류를 간소화하고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서점을 통합하는 것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서점협회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인디바운드에 큰 의욕이 없었던 협회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2년 뒤인 2020년 1월 28일 헌터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듬어 아예 직접 사업에 나섰습니다. 사이트 이름은 북샵.org(Bookshop.org)였습니다.
각자 꾸미는 인터넷 서점
5명으로 뉴욕 한편에서 시작한 북샵.org의 초창기는 암울했습니다. 헌터만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언젠가 100만달러(약 13억원)를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북샵.org는 동네 서점들이 입점하는 이커머스 사이트입니다. 얼핏 이베이나 아마존, 쿠팡의 제3자 입점 방식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북샵.org에는 동네 서점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개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북샵.org에 입점한 서점은 자체적으로 개성 있는 서점 공간을 꾸밀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픽션(SF) 전문점’ ‘봄에 볼 만한 책 모아보기’ 같은 식입니다. 구매를 위해 개별 서점 사이트로 연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인터넷서점과 마찬가지로 북샵.org의 장바구니에 추가되고 각기 다른 서점의 책을 한번에 결제하고 주문할 수도 있습니다.
대규모 유통망도 구축했습니다. 동네 서점들이 인터넷 판매를 하지 못하는 걸림돌은 자체 사이트 구축과 재고 관리, 배송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북샵.org는 서적 도매업체 인그램(Ingram)과 제휴했습니다. 동네 서점은 북샵.org에서 직접 판매하고 배송할 수도 있고, 재고 관리와 배송을 북샵.org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북샵.org 사이트에 입점한 동네 서점에서 판매가 이뤄지면 그 주문을 그대로 북샵.org가 넘겨받아 나머지 절차를 대행해줍니다. 동네 서점이 북샵.org에서 책을 공급받는 가격은 표지 가격에서 30% 할인된 수준입니다. 30%의 마진이 무조건 보장되는 겁니다.
하루에 100만달러 책 판매
북샵.org는 입점사들 가운데 판매와 배송을 일임하는 곳에는 정기적으로 북샵.org 전체 영업이익의 10%를 추가로 배분합니다. 마치 협동조합 같은 개념이죠.
헌터는 와이어드에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이 행운이었다”고 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봉쇄가 이어지고 사람들의 외출이 줄어들면서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빅테크에 대한 쏠림 현상이 오히려 심각해졌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동네 서점들의 매출은 쪼그라들었고 수많은 곳이 문을 닫았습니다. 동네 서점들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북샵.org가 등장한 겁니다. 창업 다음 달인 2월에 5만달러였던 매출은 3월에는 하루 7만5000달러로 늘었고 4개월째가 되자 헌터의 목표인 100만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여름이 되자 하루 매출이 100만달러에 육박했습니다. 지금까지 북샵.org가 동네 서점에 나눠준 수익 셰어만 2500만달러가 넘습니다. 현재 북샵.org에 입점한 동네 서점은 미국과 영국을 합쳐 2200곳에 이릅니다.
헌터의 꿈은 훨씬 더 큽니다. 북샵.org로 성공을 거둔 헌터는 아마존이 없애버린 다른 영역으로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꿈꾸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철물점 같은 동네 상점과 장난감 가게입니다. 책을 공구나 장난감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아마존과 같은 ‘에브리싱 스토어(모든 것의 상점)’를 소규모 상점의 연합체만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헌터의 생각입니다.
뉴욕타임스는 “북샵.org가 또 다른 아마존이 될 것이라고 느끼는 동네 서점들의 인식이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했습니다. 아마존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아마존의 편리함과 그로 인한 출판 시장의 성장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마존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고 시장 자체를 망가뜨렸습니다. 이미 큰 아픔을 경험한 동네 서점들 입장에서는 북샵.org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거대한 경쟁자일 뿐이라는 겁니다. 헌터가 결국 베이조스의 길을 가게 될까요. 결과가 어찌 되든 아마존 제국에 사실상 맨손으로 대항해 균열을 낸 용감한 창업자의 얘기는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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