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대통령의 계급투쟁
[아침햇발]
이재성 논설위원
‘제조업 전도사’ 장하준 영국 런던대 교수는 최근 펴낸 책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에서도 탈산업사회 담론의 허구성에 대한 실증적인 논박을 이어간다. 예를 들어 금융과 서비스업에 특화한 선진 경제의 사례로 거론되는 스위스나 싱가포르가 실은 제조업이 가장 발달한(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 세계 1·2위) 산업화 국가들이라는 근거를 제시한다. 경제가 발전하면 임금이 올라 제조업이 쇠퇴하므로 서비스업 중심으로 성장을 이어가야 한다는 탈산업화 논리가 근시안적 편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겉으로 보기에 스위스의 제조업은 명품 시계나 초콜릿 정도이고, 싱가포르는 그마저 떠오르는 게 없지만, 두 나라는 경제학에서 생산재라 부르는 기계나 정밀 장비, 산업용 화학 물질 등 소비자 눈에 보이지 않는 중간재를 주로 만든다. 금융이나 경영컨설팅, 디자인 같은 서비스업은 제조업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제조업과 함께 성장하는 산업이다.
장 교수의 지론대로 제조업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짝퉁’ 영국제를 만들어 팔던 후발산업국가 독일이 유럽 경제의 견인차가 되고, 만성적 저성장과 자산 디플레를 수십 년 겪고 있는 일본이 여전히 버티는 이유도 제조업이 탄탄해서다.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미국과 영국에서 제조업이 빠르게 몰락한 원인은 미국과 영국이 쌍두마차로 이끌었던 신자유주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무자비한 반노동 정책으로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렸고, ‘작은 정부’를 모토로 재정 긴축과 복지 축소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흔들었다.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 공세로 약해진 건 사실이지만, 노동이사제로 대표되는 독일의 노동 존중 전통과 일본의 종신고용이 상징하는 안정적인 노동 환경이 제조업을 지키는 데 더 유능했음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이 중국과의 디커플링과 리쇼어링 정책을 통해 산업시설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는 것은 중국 견제나 공급망의 안정성 확보뿐 아니라 제조업과 노동(고용)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기축통화와 군사력, 드넓은 시장을 배경으로 군사작전하듯이 제조업 살리기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제 ‘러스트 벨트’는 옛말이고, 공장과 연구소가 잇따라 들어서며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 영국은 미국 같은 힘이 없으니 하층 노동자들의 일자리라도 지키려고 브렉시트를 감행한 것이다. 브렉시트를 원한 것은 영국 자본이 아니라 노동자들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최근 행보의 공통점은 노동자의 희망사항을 국가 정책과 일치시키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은 자본과 노동을 대립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생의 관점에서 제조업을 강화하는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 미국 반도체과학법에 노동자의 보육 지원 의무가 포함된 것이 좋은 예다. 미국 정부가 세금을 지원할 테니, 외국 기업들은 노동자의 자녀를 책임지라는 얘기다. 사회안전망이 약한 미국 정부의 고육지책인 셈이다. 반도체 생산시설 접근 허용과 초과이익 공유 등 독소조항으로 세계의 반발과 우려를 부르는 법안이지만, 미국 노동자들은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의 경우 감세와 복지 축소를 추진했던 리즈 트러스 총리가 되레 실각으로 몰린 걸 보면, 영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떤 신세인지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내부의 적”으로 규정했던 강성 노조는 낮은 생산성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신자유주의는 효율성이란 미명아래 단기 이익에 치중하는 주주자본주의에 빠졌고, 기술개발과 투자를 게을리하며 제조업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신자유주의의 파탄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이미 기정사실화됐지만, 여전히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통령이 선두에서 노동계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같은 노선이었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지금 정부처럼 공정위까지 동원할 정도로 악랄하진 않았다. 미국 노총은 며칠 전 한-미 정상회담에 즈음하여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의 노조 탄압은 미국의 노동자 권리 지원과 증진을 위한 바이든 대통령의 모든 노력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 한국 정부가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과 노조결성권의 온전한 행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민주국가들의 공동 행보를 주도하거나 무역파트너로서 우호적인 조처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최악인 것은 단지 반노동적이어서만은 아니다. 무식한데 무식한 줄 모르고, 시대의 변화에 대한 통찰은커녕 철지난 이데올로기로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절벽으로 몰고가는 위험한 정부라서 최악이다. 그가 강조하는 자유란 신‘자유’주의적 계급투쟁의 이념적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걸 이제 알만한 사람은 안다.
확신에 찬 시대착오는 외교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는 현재의 국제 정세를 냉전 시대의 ‘자유(서방)세계’와 ‘공산독재’ 세력의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랜 검사 생활로 몸에 밴 대결적 신념으로 세상을 편가르고, 중국·러시아와 다툼을 자처한다. 이들과의 대결을 글로벌 수준의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의 대통령은 홀로 20세기와 싸우고 있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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