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만큼 일할래요”…청년 ‘조용한 퇴사’에 빠지다
작년 미국서 시작된 ‘조용한 퇴사’ 열풍
국내서도 2030 직장인의 80%가 동의
‘보상 미약한 추가 노동’이 가장 큰 이유
#공기업에 재직 중인 강준희(이하 가명)씨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를 지향한다. 강씨는 “회사에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회사 생활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며 “더 나은 보수와 업무환경, 커리어를 위해서는 언제든 사직서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이티(IT) 업계에서 일하는 3년차 직장인 이정민(25)씨는 언제든지 이직할 준비가 돼 있다. 이씨는 “기약 없는 야근이 너무 많아 몸이 망가지는 중”이라며 “일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데 몸을 갈아가면서 일해야 할까. 건강을 해치는 수준이 된다면 퇴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근 엠제트(MZ)세대 사이에서 ‘조용한 퇴사’가 화제다. ‘조용한 퇴사’는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진 않지만 ‘자신이 맡은 최소한의 업무만 처리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신조어다. 직장에 대한 열정이나 애정을 거두고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안에서만 일하겠다는 태도인데, 심적으로 ‘퇴사에 가까운 마음가짐’을 갖고 회사 생활을 하겠다는 뜻이다.
지난해 7월 미국의 20대 엔지니어가 이 단어를 소개하며 “일은 당신의 삶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틱톡 영상이 전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으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공감대가 확산했다.
국내에서도 2030 직장인 사이에 ‘조용한 퇴사’ 바람이 부는 모양새다. 지난 2월6일 구인구직 전문 포털 알바천국이 MZ세대 1448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79.7%)이 조용한 퇴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유로는 ‘정당한 보상이 따르지 않는 추가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1위(62.7%)로 꼽혔다. 이어 ‘일과 일상의 분리가 필요해서’(37.4%),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라고 보기 때문에’(23.2%), ‘회사와 개인의 성장을 구분하기 위해서 ’(20.3%), ‘일·성과 중심의 사회가 변화하길 바라서’(13.6%) 등의 답변이 뒤따랐다. 앞서 2021년 12월 채용 플랫폼 사람인이 직장인 392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70%가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답했는데, 20대(78.5%)와 30대(77.1%)에서 압도적으로 높았다.
기자도 10명의 청년과 인터뷰해 조용한 퇴사에 대한 ‘MZ세대의 속마음’을 들어봤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더 나은 회사로의 이직이 성공한다면 언제나 지금의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현재 조용한 퇴사 상태라고 밝힌 김보민(26)씨가 한 말이다. 공기업에 2년째 근무 중인 김씨는 “직장에 얽매여 있지 않고 퇴근 뒤 내 삶에 더 집중하는 것이 MZ의 일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제조업 구매 직무를 맡은 김도현(24)씨도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조용한 퇴사’ 역시 하나의 직장 문화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동물병원 코디네이터로 2년간 일하다 퇴사한 홍지수(24)씨 또한 조용한 퇴사에 공감했다. 홍씨는 “한 사람에게 2~3인분 (업무를) 요구하는 게 문제”라며 “내 담당이 아닌 일까지 떠맡는 경우가 생기면 이 회사에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솔직히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았느냐”며 “우리 세대는 ‘이 회사를 위해 내가 왜 내 몸을 불살라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비스기획 분야에서 2년여 일한 박수현(25)씨는 불필요한 야근과 강제적인 회식, 과중 업무 등에 시달리다 최근 퇴사했다. 박씨는 권위적인 팀 분위기에 답답함과 우울감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박씨는 조용한 퇴사를 ‘일종의 저전력 모드’라고 평가했다. 그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과 마음의 체력을 남겨두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서비스운영 일을 하다 전문성 향상을 위해 4월 퇴사를 결정한 장해인(32)씨는 “회사는 인재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진정으로 고민해야만 한다. 앞으로는 이 고민을 하는 회사와 하지 않는 회사 간 차이가 발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청년들은 이미 학업과 취업을 위해 한계 이상의 에너지를 쏟았어요. 끊임없는 압박, 비교,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바늘구멍을 통과해 부를 쌓기보다는 오늘의 안온한 하루가 더 중요합니다.”(22살 대학생 배아무개씨) 배씨는 조용한 퇴사가 “저성장시대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생관”이라며 “열심히 일해도 계층이동을 하기 어려운 시대에 주어진 일을 넘어서서 더 많은 일을 하겠다는 열정을 갖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조용한 퇴사를 ‘무책임한 태도’라고 규정하거나 “MZ세대 중 상당수는 더 치열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반응도 있었다. 공기업에서 시설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5년차 직장인 권승현(28)씨는 “조용한 퇴사가 MZ세대에서 주목받긴 했지만 이전부터 이런 사람들은 있었다”며 “이해되지만 지향하진 않는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년차 마케팅 에이전시 근로자 신재원씨는 “MZ세대는 자기 능력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데 관심이 많다. 여행을 가더라도 깨달음을 얻으려 하고 잠시 쉴 때도 운동과 공부를 병행한다. 젊은이들이 정말 회사 발전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라고 반문했다.
일각에는 ‘조용한 퇴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단어의 뉘앙스가 성실히 일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줘 청년이 괜한 눈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대학생 배씨는 “본 단어인 ‘Quiet Quitting’을 직역하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워라밸 지키기’가 본래 뜻에 좀더 적합한 한국식 표현인 것 같다”고 제안했다. 박씨도 “퇴사라는 단어가 부정적 느낌을 주는데다 정확한 내용을 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개인 시간 수호’ ‘맞장구치기 태만’ 정도로 설명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젊은이들과 성과를 중시하는 기성세대의 갈등은 이미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기성세대의 곱지 않은 시선을 청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윗세대는 청년들이 받은 만큼만 일하려는 것이나 회사 발전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자세 등에 반감을 갖는 것 같다. 그러나 마땅한 대가가 없으면 당연히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신재원씨) “기성세대는 열심히 일했고 일한 만큼 발전하고 성공했다. 현재는 노력보다 운의 가중치가 훨씬 커졌다. 단순히 ‘나태하다’고 여기기보다 청년이 왜 그런 태도를 갖게 됐을지 생각해달라.”(대학생 배씨)
전문가들은 MZ세대의 개인주의적 특성과 함께 사회 불안정성을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사람들이 집단에 갖는 귀속감이나 충성심이 예전 같지는 않다. 이들은 직장 이동을 굉장히 쉽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자기 선호에 따라서 신속히 판단하고 공개적으로 요구한다. 수틀리면 떠나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조직 문화나 운영에 대한 성찰,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현명한 태도”라며 “지금 청년은 불확실한 미래에 내몰려 있다. 우리 사회가 청년에게 희망이나 확신을 주지 못하는데, 이들 나름대로 찾은 자기 보호적 방안이 조용한 퇴사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사회에 MZ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나 낙인은 없는지 돌아보고, 이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직 갈등 전문가는 “충분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한솔 에이치에스지(HSG) 휴먼솔루션그룹 조직갈등연구소 소장은 “조직은 구성원 개개인에게 관심을 두고 각자의 역량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많은 문제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 데서 생기므로 구성원에게 바라는 역할에 대해 명확히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또 “구성원 역시 본인이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김 소장은 그러면서 “조직과 구성원은 ‘계약’ 관계라는 전제 인식이 중요하다.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 떠날 수 있는 관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이화랑 객원기자 hwarang_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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