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칼럼] 다만 국민의 한 사람이 하는 생각
이경자 | 소설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오로지 힘이라면 투표권 하나뿐인 사람. 요즘 간절해진 꿈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뉴스가 궁금해서 리모컨을 집어 들다가 문득 정신이 차려져서 그만뒀습니다. 왠지 아침이어서 티브이(TV)가 켜지는 순간, 소위 정치하시는 분들의 얼굴이며 목소리며 그들의 동정이 보이고 들리고 소개될 것 같아서요.
그분들에 대한 분노, 혐오, 실망과 그분들이 가졌을, 저 같은 오로지 투표권만 가진 국민으로서는 상상이 불가능한 ‘특권’이 질투와 울화통을 한꺼번에 끌어올려서 뉴스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건 순전히 옹졸하고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에 대한 사실적 이해의 부족으로부터 발생한 저의 열등감일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저는 딸로 태어나서 그 순간부터, 아버지, 남자형제, 집 밖에선 온갖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저절로 익히고 배운 것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모두 ‘피해자’ ‘약자’의 잘못이라고. 네가 잘하면 어른이, 선생님이, 부모님이 그렇게 했겠느냐!
아니요, 선생님이 잘못하셨습니다! 이렇게 항의하면 반항아가 되고 문제아가 돼 ‘교육할 수 없다’고 퇴학당하는 성장기의 조건들. 그런 조건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조금씩 노예근성을 가지게 된 저의 인생.
저는 당당한 자아를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데 실제 제 내면의 노예들을 다 지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저는 잘 모르지만 혹시 민주주의라는 건 이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인간관계를 평등하게 하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거 아닐까요? 저 수많은 인권선언들을 봐도 그렇잖아요.
물론 제가 이 글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트집 잡으려는 건 아니고, 다만 왜 제가 정치가분들이 나오시는 뉴스를 못 보는 병에 걸렸는지 더듬어보려는 것뿐입니다.
저는 정치를 좋아하고 정치의 중요성도 조금은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거철이 오면 꼭 투표소에 갔습니다. 유일한 권리니까요. 여태 선거에서 기권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정치는 개인의 생활과 국가 살림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행복과 불행도 결정하는 ‘괴물’이라 믿어서요.
그런데 이제 신물이 납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뉴스라고 여겼는데, 그것도 아주 잠깐. 어느 땐가부터 뉴스를 못 봅니다. 저의 정신건강을 위해서입니다. 비아냥과 조롱과 호통과 폭로와 모독과 파렴치와 아첨에 법을 기름 바른 장어보다 더 미끄럽게 휘두르는 기술까지, 그 모든 것이 돈과 권력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들.
층간소음이 사회적 문제라고 합니다. 저 여의도에서 들려오는 것, 중요하고 훌륭한 분들이 모여 있기에 그 소음조차도 텔레비전의 주인공일 테지만 저에겐 왜 그저 소음일까요? 시끄럽고 불쾌한 소리로만 들릴까요? 당신들은 모든 말에 국민을 주인공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정작 국민의 한 사람인 저에겐 ‘절대적 국민소외’로 느껴지고 비칩니다.
당신들의 탄생, 그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볼까요?
저는 근년에 이르러 선거철만 되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집니다. 지하철 입구나 시장 어귀, 아파트 등지에서 당신들을 만납니다. 어찌나 겸손한 태도를 보이시는지요. 겸손이 지나쳐 비굴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그 비굴이 두렵습니다. 당신이란 존재도, 비굴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요. 하지만 그래서라도 목표만 달성하고 나면 만사형통의 시간이 기다릴 테니까요. 당신을 위한, 당신의 다양한 야망과 복잡한 욕망들이 만나게 될 만사형통의 시간!
그러나 당신이 그토록 허리 굽히고 친숙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으로 가득한 표정을 보여주던 국민으로부터 당신은 사라집니다. 당신으로 향하는 문이 닫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다음 선거를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의 시간은 빈부귀천을 떠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당신들과 우리 서민 국민이 공통으로 가진 것도, 한가지는 있어야 할 테니까요.
국민의 생활에 기준과 질서를 가져오는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게 하고 국민으로부터 거둬들인 돈을 쥐락펴락하는 능력과 권한은 모두 당신들이 가졌지만 그래서 국민일 뿐인 제가 너무도 참혹하게 비참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한가지, 시간은 공평하게 가졌네요.(눈물 납니다.)
국민으로부터 거둬들인 돈. 이거 무서운 것입니다. 집집이 살림하는 사람들은 대개 물 한방울도 아낍니다. 요즘은 대기오염이니 온난화니 자연재해니 하는 것으로부터 지구 생명을 지키겠다고 휴지 한장, 비닐 한개 덜 쓰려고 궁리하고 실천합니다.
나라 살림은 집안 살림하고 다를까요? 저는 무슨 공사니 하는 곳에서 엄청난 적자가 생겨 각 가정으로부터 돈을 더 거둬야 한다고 할 때,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마치 공동경비를 거둬서 여행을 갔는데 돈 관리하던 분이 경위도 밝히지 않은 채 ‘돈 다 썼으니 더 걷자!’라고 했을 때의 황당함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대부분의 국민이 돈이나 냈지, 정작 그 공공기관에 관해 알 수는 없지만 보도로는 임원들의 월급은 어마어마하더군요. 복지라고 해서, 혹은 견문을 넓힌다고 해서 회삿돈으로 세계 여행을 다니시고….
언제부터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복(公僕)이란 개념이 지워졌을까요? 그 속에 사회의 정의, 혹은 공동체 의식이 들어 있었을 텐데요. 공직을 얻은 뒤 재산이 불어났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당신을 상상하는 건, 제가 무한 유치해서 그럴 테죠?
정치가인 당신들은 훌륭해져야 합니다.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우리 미래의 시간입니다. 그 미래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성찰해주십시오. 왜 청소년 자살 비율은 높아만 가고, 마약 범죄와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는지, 이 모든 부정적 영향의 원천지가 어디인지 수치심과 고통을 무릅쓰고 성찰해보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당신들의 막중한 책무를 다할 것인지, 제발 고민해주십시오. 정치가라는 직업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직업!
일이 안 풀릴 때, 국가와 국민의 오늘과 내일의 삶을 생각해보셔요. 거기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의 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근면 성실한 국민 덕에 이만큼 살게 됐는데 왜 국민에게 박탈감, 좌절감, 모멸감, 허무감을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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