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 책서 진맥소주 확인··· '유레카' 외쳤죠"

글·사진=송영규 선임기자 2023. 4. 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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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로 소주 만드는 '밀과노닐다' 박성호 이사
7년 연구개발 끝에 2019년 출시
고소한 향에 약간 매운 맛 감돌아
입소문 타고 오픈런 소주로 인기
명품 소주 마을 만들어 청년 유인
우리 술·고장 지속 가능하게 할것
박성호 밀과노닐다 이사가 지하 저장고 안에서 밀로 만든 소주를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경제]

지프차를 타고 봄 가뭄으로 얕아진 강물을 건너 만난 한 마을. 펜션으로 쓰이는 건축물과 카페, 화성의 인류 정착촌처럼 생긴 비닐하우스 뒤로 3만여 평 규모의 밭이 방문객을 반긴다. 그 안에서 자라는 푸른 새싹들, 밀이다. 남들은 밀로 빵을 만들고 국수를 뽑아내지만 여기서는 술을 빚는다. ‘진맥(眞麥·밀)소주’가 그것이다.

밀로 만든 소주인 ‘진맥소주’는 전국에서 단 한 곳 농업회사법인 ‘밀과노닐다’에서만 나오는 술이다. 경북 안동 가송리 맹개마을에서 만난 박성호 이사가 7년을 연구개발해 2019년 처음 세상에 선보인 작품이다. 처음에는 1년에 1200병만 팔자며 소박하게 출발했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이제는 내놓기가 무섭게 사라져 못 사는 ‘오픈런’ 술이 됐다. 법인 밀과노닐다는 현재 그의 부인 김선영 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원래는 한 달 100병 판매를 목표로 했어요. 영업을 해본 적도 없어 주점에 가서 쭈뼛거리다 ‘이런 소주가 있으니 한번 맛 보시겠습니까’ 하고 건넨 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인터넷으로 팔기 시작했는데 그게 입소문을 탔고 이제는 너무 많이 사랑을 해주십니다.”

박성호 밀과노닐다 이사가 자신이 밀을 키우고 있는 밭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밭은 그가 맹개마을에 조성한 여러 밭 중 하나로 규모는 1만 평에 달한다.

박 이사는 원래 잘나가는 정보기술(IT) 기업을 창업한 개발자 출신이었다. 매일 기술 개발과 영업에 매달리기를 10년. 몸도 마음도 지쳐가면서 도시를 떠나 맹개마을에 정착했다. 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순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농사를 지어야 했지만 초보 농부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혼자 지을 수 있는 쉬운 농사를 하는 것”이라며 “때마침 마을 주민 중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하는 분이 있어 나도 기왕이면 가치 있는 일을 해 보자며 밀을 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1년간 수확한 결과물을 보니 서울에서 한 달에 번 것 정도밖에 안 됐다. 대안으로 빵도 굽고 된장도 만들었지만 여전히 시원치 않았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때 퍼뜩 스치고 지나간 것이 밀로 술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술의 99.9%는 물과 알코올로 이뤄진다. 하지만 맛과 향을 결정하는 것은 0.1%의 곡물과 기름이다. 밀은 차가운 느낌의 쌀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갖는다. 박 이사는 “밀은 10월에 파종해 6월께 수확하는데 추위를 견디기 위해 뿌리에 열을 가둔다”면서 “진맥소주를 마실 때 따뜻한 느낌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밀의 또 다른 특징은 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고소한 향을 풍기며 약간 매운맛도 감돈다. 수율이 훨씬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큰 문제가 안 됐다. 그가 밀 농사를 하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박 이사는 “수율을 버리고 향을 얻은 것은 행운”이라고 평가했다.

박성호 밀과노닐다 이사가 밀로 만드는 소주에 사용되는 증류기 앞에서 진맥소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진맥소주’라는 브랜드명은 1540년 조선의 조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에 밀로 소주를 만드는 법이 소개돼 있는 것을 우연히 확인한 후 채택됐다. 밀소주가 500년 전 존재했다는 점을 확인한 순간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수운잡방에서 진맥소주를 본 순간 ‘유레카’를 외쳤다”며 “내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라고 덧붙였다.

진맥소주는 직접 친환경 재배한 통밀로 술을 빚고 숙성한다. 파종부터 숙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2년 정도. 생산도 500ℓ짜리 증류기를 이용해 약 100ℓ의 술을 뽑아낸다. 당연히 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박 이사는 술에 진심이다. 와인을 알기 위해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고 위스키가 궁금해 스코틀랜드 저장고까지 직접 방문했다. 술의 변신이 어디까지인지 알기 위해 소주를 항아리가 아닌 오크통에서 숙성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53도 오크통 숙성 소주다. 연내 미국 시장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다른 증류주도 속속 대기 중이다. 그는 “지천에 널려 있는 과일 등이 모두 술의 재료”라며 “연내 사과 증류주, 내년에는 모과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박성호 밀과노닐다 이사가 카페 겸 손님과의 대화방으로 마련한 공간에서 진맥소주의 발전 방향과 지향점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박 이사가 진맥소주에 열정을 쏟는 것은 ‘지속 가능성’ 때문이다. 모든 전기를 태양광으로 충당하고 술을 만들고 난 지게미나 폐수를 재활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 술과 맹개마을이 다시 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좋은 해법은 진맥소주를 아주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겠죠. 명품 소주를 만들고 명품 마을을 만들면 젊은 친구들이 찾아오면서 명맥이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늘 표방하는 술의 목표점이자 지향점입니다.”

글·사진=송영규 선임기자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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