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입는 힙한 목사님…슴슴한 아메리칸 캐주얼의 정석
김정열 신사동 수박빈티지 대표
주말엔 교회, 평일엔 빈티지숍 운영
폴로 버튼 셔츠·리바이스 501처럼
질리지 않는 90년대 제품 큐레이팅
최근 몇 년. 나는 일반 매장에서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패션업계에서 일한 이후 십 수년간 이런저런 옷을 다양하게 경험하다 보니 재미가 좀 시들해지기도 했고, 아주 쨍하고 반들반들한 원단이 주는 생경함도 조금 불편해졌다고 할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더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것이 빈티지다. 나는 최근 많게는 월 네다섯 개, 적게는 한두 개의 소소한 물건을 부담 없이 사고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한국의 빈티지 시장은 최근 몇 년 새 아주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패션 문화 확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르고,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제품을 찾고 즐기는 개인이 늘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경제가 사나워지면서 세컨드 핸드(중고품)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수도 있다. 환경을 위해 새 옷의 구매를 줄이는 누군가의 영향도 있겠다. 다 맞는 얘기다.
개인적으론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빈티지숍들이 꾸준히 성장하며 이름을 알리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좋은 가게가 늘어나면서 소비자도 많아지는 선순환으로 한국의 빈티지 열풍은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빈티지 시장, 그 중심에서 지난 몇 년간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곳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단순히 매장에서 뭘 파는지 알리는 것보다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서울 신사동 수박빈티지의 김정열 대표다. 수박빈티지를 알게 된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패션 커뮤니티에 재미있는 공간이 있다는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어떤 빈티지 점포 사장이 목사라 평일엔 매장으로 운영하고 주말엔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쓴다고 했다. 사장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박빈티지 김 대표였다. 김 대표는 이제 친구이기도 하다. 어릴 때 같은 교회를 다녔고 나이가 같아 안면을 트자마자 바로 친구가 됐다.
▶수박빈티지를 소개하면.
수박빈티지는 1990년대 전후 아메리칸 캐주얼을 메인으로 큐레이팅하는 곳입니다. 오리지널 빈티지를 모티브로 해 현시대에 맞는 캐주얼로 재해석한 제품이 많아요. M47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장교들이 입던 주름(플리츠) 잡힌 바지를 1990년대 브랜드에서 복각한 치노 팬츠나, 미군 장교의 오피서 치노 팬츠 디자인을 모티브로 삼아 현대 캐주얼로 재해석한 바지 같은 거죠.
▶빈티지숍을 열게 된 계기는.
군대에서 패션을 인생의 업으로 삼기로 했어요. 그러다 결국 신학을 공부하게 됐는데,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계속 패션에 마음이 갔죠. 어느 날 인간관계의 중심에 패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2017년 11월에 마음을 굳혔습니다. 패션 목회를 해보기로. 이듬해인 2018년 1월, 서울 역삼동에 역삼수박을 열었어요.
▶왜 수박인가.
수박은 위장막이에요. 군대에서 쓰는 카모플라주, 전장에서 나를 숨길 때 사용하는 거 아시죠. 저는 수박빈티지 구제가게 아저씨지만 사실은 목사에요. 그러니까 옷을 파는 건 위장인 셈입니다. 그리고 수박은 맛있잖아요. 친근하고, 쉽고, 단순하고. 한글로 썼을 때 예뻐서 좋았고. 코리안 빈티지라고 부를 수 있는 헌트와 언더우드 같은 브랜드를 파는 느낌도 있어요. 무엇보다 수박은 녹색과 검정이죠. 우리가 열광하는 색깔. 근데 목사라고 해서 빈티지숍을 선교 수단으로 생각하진 않아요. 전 그게 교만이라고 생각해요.
▶수박빈티지의 강점은.
1990년대 아메리칸 캐주얼 가운데서도 폴로 랄프로렌의 옥스포드 코튼 소재 버튼 다운 셔츠와 1990년대 전후 출시된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가장 수박다운 아이템으로 꼽아요. 이유는 수박의 페르소나인 우디 앨런 때문이에요. 자극적이진 않지만 언제 찾아도 좋잖아요. 슴슴한 평양냉면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 501에 있죠. 우디 앨런의 올드 아이비리그 스타일도 같은 의미를 지니죠. 501을 중심으로 여기에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을 곁들입니다.
지승렬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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