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바이오·신소재…이공계 박사, 산업계 진출 급물살 탄다
서울·연세·성균관 등 6개 대학
현대차·한미약품 기업 협업
박사후 연구원 174명 참여해
180개 연구서 65개 특허 출원
대학·연구소 선호하던 인재들
잇달아 민간기업에 둥지 틀어
4차 산업혁명 시대 경쟁력 확보에 '필수 인력'인 이공계 박사가 본격적으로 산업계로 확산되기 위한 물꼬가 트이고 있다. 전문화된 역량을 보유한 이공계 박사후연구원을 산업계로 진출시키기 위해 대학과 정부가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시범 운영되는 '혁신성장 선도 고급 연구인재 성장 지원(KIURI·키우리) 사업'을 통해서다. 키우리는 박사후연구원이 민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초이자 유일한 정부 지원 사업이다.
서울대·성균관대·아주대·연세대·인하대·포항공대 등 6개교 키우리 연구단에 소속된 박사후연구원 174명(누적)은 길게는 3년간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미래 유망 기술 분야 관련 기업과 함께 연구개발(R&D)에 집중하고 있다. 아직 사업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들 중 상당수는 관련 기업에 취업해 연구를 이어가거나 창업하고, 기술 이전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등 민간 분야에서 역량을 펼치고 있다.
일례로 연세대 '극한물성소재·초고부가부품 키우리 연구단' 소속 이승용 박사(34)는 산화아연을 통해 자외선 흡수 원료 소재 물질을 개발해 최근 화장품 소재 관련 기업 케미랜드에 1억원에 기술 이전을 완료했다. 이 박사는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주로 학술 연구를 해왔는데 키우리 사업단에 소속되면서 기업과 함께 연구할 기회를 얻고, 이 과정에서 내 기술이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실제 학문적 성과와는 또 다른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나를 포함해 많은 과학자가 학문적으로는 중요하지만 기업·산업과 동떨어진 연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때문에 학교와 기업의 간극이 큰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키우리 연구단을 통해 산업에서 연구자에게 원하는 기술이 무엇인지 알게 돼 이 수요에 맞춘 연구를 할 수 있는 감각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연세대 연구단은 미래 자동차용 핵심 소재 부품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춘다. 이우영 연세대 키우리 연구단장은 "우리나라 코스닥 상장사에는 박사를 구하는 일이 참 어려운 문제이고, 특히 소재 부품 쪽은 더 그렇다"며 "이쪽으로 박사들을 연결할 수 있게끔 물꼬를 터주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현재 박사후연구원의 민간 기업 취업 선호도가 크게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발간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국내 신규 박사학위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박사 인력 중 민간 기업에 취업을 희망하는 비율은 6.2%에 불과했다. 박사 인력 중 73.1%는 대학과 공공기관 취업을 희망한다.
역으로 민간 부문에서는 박사 인력 확보가 절실하지만 절대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매일경제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를 통해 입수한 국내 기업의 석·박사 연구 인력 현황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연구소나 연구 전담 부서가 있는 국내 전체 대·중견·중소기업 7만6565곳 중 박사 이상 연구원을 한 명이라도 보유한 기업은 10.9%에 불과했다. 업종별로 놓고 봤을 때도 박사급 전문 인력 수요가 많을 것으로 판단되는 전문 과학·기술서비스업 관련 기업 7262개 중 75%(5448개)가 박사 연구원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키우리는 이러한 기업과 박사 인력의 수요·공급 간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소하기 위한 첫 시도다.
'에너지환경 바이오 융합 고급인재 양성 연구단'을 이끄는 이진용 성균관대 교수는 "박사들의 경우 민간 기업에 안 가려 하기보다 기업으로 가는 진로에 대한 생소함이 컸던 것 같다"며 "실제 사업단을 통해 산업체와 일하면서 민간 기업으로 진로를 정하는 사례가 있었고, 특히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에너지, 환경, 헬스케어를 중점 연구 분야로 두고 있는 성균관대 연구단은 처음부터 연구원과 기업 간 일대일 매칭을 통해 기업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하는 모델로 운영되고 있다.
인하대 '수소 기반 차세대 기계시스템 연구단'의 문석수 교수 역시 "박사들이 기업 수요에 맞게 기술을 개발하도록 요청을 받다 보니 실용적인 연구와 산업계 수요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커졌다"며 "이런 측면을 배워갈 수 있게 해주는 게 키우리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인하대 연구단은 기계공학, 화학공학, 화학, 전자공학, 환경공학, 신소재공학 등 여러 분야 박사가 모여 총체적인 학문 영역 간 협력 활동을 하는 '다학제 간 연구시스템'을 통해 친환경 연료인 수소 생산 기술과 수소용 소재 부품 개발 등을 연구한다.
아주대 'AI·초융합 키우리 질환극복 중개 연구단'은 국내 바이오·제약 기업 매출 중 70%를 차지하는 경기 남부 지역에 위치해 활발한 바이오 분야 산학협력 플랫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김병곤 아주대 키우리 연구단장은 "공대·약대 소속 박사는 의대나 병원에 있는 엄청난 데이터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 관련 연구를 포기하는 일이 많다"며 "키우리 사업단을 통해 박사들이 바이오 데이터에 대한 접근·분석이 가능한 '바이오인공지능센터'를 구성해 운영하고, 빅데이터 기반 약물 개발 분야 등의 연구를 활성화했다"고 설명했다. 아주대를 포함해 서울대와 포항공대 등 바이오·헬스케어 분야를 연구하는 키우리 연구단에서는 박사들과 벤처기업 간 협업이 많다. 서울대 'K-BIO 신성장동력 키우리 인력 양성 연구단'은 박사들의 연구를 돕고 지원하는 멘토단을 서울대 출신 창업가들 위주로 구성했다. 강건욱 서울대 키우리 멘토 교수(의대 교수)는 "바이오 분야에서는 산업 특성상 인재들이 중견기업보다 성장성이 있는 벤처기업으로 가려는 수요가 많다"며 "창업 후 기업공개에 성공한 모교 선배들의 코칭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교육 프로그램에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실제 창업하기도 했지만 키우리 연구단 소속 박사들이 최고기술책임자(CTO), 최고전략책임자(CSO) 등으로 영입되는 사례도 상당했다"고 덧붙였다.
이지오 포항공대 '바이오 분자집게기술 연구단' 단장은 "기존 포스닥 지원 제도와 달리 논문보다는 산업체에서 실제로 진행하는 연구, 창업화할 수 있는 기술 연구에 방점을 뒀다"며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이 모여 있기 때문에 네트워크 형성 측면에서도 좋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포항공대 키우리 사업단 소속 박사를 중심으로 피부를 통해 인슐린을 흡수할 수 있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바이오 벤처가 탄생하기도 했다. 그는 "바이오 산업에서는 기업이 1년에 1000개씩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는 금방 인력 부족에 처하게 될 수 있다는 뜻"이라며 "키우리 같은 사업이 잘돼야 핵심 인력이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새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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