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사형수의 아버지, 사도법관 김홍섭

2023. 4. 27. 17: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법조 3대 聖人 중 한 명
극형 앞둔 이 감화시키고
신앙의 代父 돼 준 판사
흔들리는 법대생 잡아준
우리 시대 기적의 씨앗

지난 4월 1일 명동성당에선 우리 근현대사의 참신앙인을 추모하는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도법관(使徒法官) 김홍섭 판사를 기리는 예식입니다. '기억하다, 빛과 소금이 된 이들'로서 안중근 의사, 노숙인 병원 설립자 선우경식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해방된 1945년 검사로 임관해 다음 해 판사로 옮겨 1965년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숱한 헌신과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받았습니다. 대한민국 법조의 세 성인(聖人)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가톨릭법조회 회원들과 함께 미사에 참석하면서 김홍섭과의 인연을 새겨봅니다.

1984년 법과대학에 입학했을 때, 대학서점에 놓인 그분의 책자 '무상(無常)을 넘어서'는 법대 초년생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형수들을 만나 감화시키고 신앙의 대부(代父)가 되어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사납게 행패를 부리던 사형수가 김홍섭을 만나 세례를 받고는 온유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사형수 70명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190통 넘게 남아 있습니다. 법에 따라 극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을 때, 목이 메어 머리를 숙인 후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죄인으로 단언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토로합니다. 숙연해진 법정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를 놓고 늘 번민했습니다.

부장판사 시절에도 단무지 반찬 도시락이나 삶은 고구마 한 개로 점심을 해결해 '고구마 판사'라는 별명도 얻습니다. 평생 강직했지만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친척들의 청탁은 칼같이 거절했지만, 사형수의 동생을 법원 직원으로 취직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합니다. 이분의 삶을 흠모하여 법조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법조인의 표상이 된 김홍섭의 중심에는 굳건한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사형수와 함께할 때면 무릎을 꿇고 사형수의 어깨를 감싸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지켜보던 교도관의 눈시울도 뜨거워졌습니다. 김홍섭의 신앙은 8남매 자녀 중 장남인 김정훈에게 이어집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사제서품을 앞두고 유학지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에서 추락 사고를 당합니다. 그가 남긴 일기, 메모와 편지를 묶어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라는 유고집이 발간됩니다. 책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한껏 담겨 있습니다. 삭발례를 받고 성직자로 첫발을 내딛던 날 일기에 '아버지, 기뻐해 주십시오. 순전히 당신 덕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조금도 멀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롭지 않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여학생으로 인한 고민과 신앙 체험들도 담겼습니다. 사법시험 준비로 힘들었던 시절, 가장 큰 힘이 된 책입니다. 아내가 된 후배에게 건넸던 첫 선물도 이 책입니다.

김홍섭은 8남매를 키운 다음에는 수도원 종지기로 평생을 지내고 싶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필자는 사법연수원 시절 파주 법원리에 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홀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외부와는 단절된 엄한 계율로 유명한 곳인데,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매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되는 수도원의 고된 일과 속에서 작은 깨달음이 찾아들 때면 김홍섭 판사님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길지 않은 수도원 체류였지만, 문을 나설 때는 단단한 각오와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30년 넘게 법조인으로 일하면서 겸손, 배려, 경청하는 마음가짐을 간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내가 맡은 사건에서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애썼습니다. 그 마음자리 중심에 김홍섭이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법대생의 마음에 심지를 세워주고, 사납게 닫힌 사형수의 마음을 따뜻한 봄기운으로 바꿔놓은 사도법관 김홍섭은 우리 시대 기적의 씨앗입니다. 참 뵙고 싶습니다.

[봉욱 전 대검 차장·변호사]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