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싶어요”…아빠는 잠적, 한국인 아이들 홀로 키우는 코피노의 엄마들
필리핀인 고줌 단디아 레인(35)과 아델 안젤라(34)는 지난 1월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코피노(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엄마다. 아이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해서 한국에 왔지만, 당장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법무부가 “아이 부모의 사실혼 관계를 입증할 수 없다”며 취업 가능한 자녀양육(F-6-2) 비자 대신 방문동거(F-1) 비자를 발급했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충북 청주시 숙소에서 경향신문이 만난 이들은 타갈로그어로 같은 말을 했다. “일하고 싶습니다.” 두 엄마는 아이 아빠로부터 양육비를 못 받았거나 소송을 통해 겨우 양육비를 받아 살고 있다.
이날 오후 2시, 안데민핵키로고줌군(11)이 노란색 스쿨버스에서 내렸다. 단디아가 펼친 우산 아래서 모자는 부슬비를 피했다. 아들의 책가방을 대신 멘 단디아와, 엄마의 팔을 꼭 붙잡은 안군이 향한 곳은 충북 청주시의 한 교회였다. 교회 유아실 안에는 안군이 방으로 쓰는 텐트가 펼쳐져 있었다. 모자는 필리핀 지인에게서 소개받은 교회에서 입국 이후 계속 머물고 있다.
단디아가 한국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의 치료였다. 필리핀에서 안군이 언어치료를 받으려면 대중교통을 타고 편도 2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가야 했다. 치료비는 1회에 한국 돈 2만5000원 수준. 정부 지원은 없었다. 유전자 검사로 한국 국적을 얻은 안군은 한국에서 특수학교에 다니고, 교육청 바우처로 월 2회 언어치료를 받고 있다. 치료기관도 대중교통으로 1시간 거리라 필리핀에서보다 상황이 나아졌다.
단디아는 교회에 샤워실·세탁기가 없어 인근 안젤라의 원룸에 가서 씻고 빨래한다. 교회 주방 한쪽에는 샴푸·로션 등이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생활은 어찌어찌 꾸려가지만 생계는 막막하다. 친척들로부터 빌려온 150만원은 이미 동났다. 안군의 생부는 연락을 끊었다. 최근 단디아는 기초생활수급자 생계비를 신청해 한국 국적인 안군 몫으로 월 60만원을 받게 됐다.
“그동안 도와준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고 싶습니다. 집도 얻고 싶고요.” 단디아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고 싶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호텔식당경영학, 토픽(한국어능력시험)을 공부했지만 비자 때문에 한국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날 오후 4시, 안젤라도 딸 김미안나아델양(10)과 하굣길을 함께 걸었다. 안젤라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 있는 유명 카지노 매니저로 일했다. 한국 돈으로 월 약 100만원을 버는 ‘중산층’이었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형편은 다르다. 안젤라의 집은 14.8㎡(4.5평) 크기의 단칸방이다. 싱글사이즈 침대에서 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잔다고 했다. 안젤라는 소송 끝에 지난달 김양의 생부로부터 양육비 80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은 원룸 보증금을 내려고 빌린 돈을 갚는 데 대부분 썼다. 재판부는 김양이 한국에 오기 전인 2020년의 필리핀 물가를 반영해 양육비를 월 20만원으로 책정했다. 얼마 전 김양은 집 근처에 패스트푸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버는 돈이 없어 이전처럼 딸에게 햄버거를 마음껏 사줄 수 없는 안젤라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안젤라가 필리핀을 떠난 이유도 딸이었다. “‘갱스터’가 시민들을 괴롭히는 것을 가끔 봤는데, 딸은 안전한 곳에서 키우고 싶었습니다. 교육 체계도 한국이 더 나을 것 같았고요.” 일자리는 이들에게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다. 안젤라는 “딸의 노래가 수준급이다. 보컬 학원에 보내고 싶다. 저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나중에 식당도 차리고 싶다”고 했다.
안젤라는 이주민을 향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도, 본인이 감내해야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선택한 일이라 받아들이려 한다”면서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지만, 섣불리 취업했다가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추방될까 봐 입사지원서를 내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정진남 드림컴트루 대표는 “한국 국적의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유일한 보호자에게 ‘일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정부가 코피노와 생모의 수용을 결정할 만큼, 엄마들에게 임대주택·건강보험·긴급 생활비 지원 등 종합적인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https://www.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2303151713001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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