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모가디슈'에서 '프라미스' 작전까지
(서울=연합뉴스) 황재훈 논설위원 = 내전이 격화한 수단을 극적으로 탈출한 대사관 직원과 교민 등 28명이 지난 25일 무사히 국내로 귀환했다. 극한 혼돈 상황에서도 현지 대사관의 신속한 상황 판단과 실행, 외교당국과 군의 혼신을 다한 조력, 교민들의 협조가 어우러진 성과였다.
'프라미스(Promise·약속)'로 명명된 수단 교민 탈출 작전 성공은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휴일 시장에 갔던 현지 대사는 심상치 않은 총성이 들리자 운동복 차림 그대로 대사관으로 돌아와 8일간 급박한 상황을 지휘했고, 대사와 공관 직원들은 무장병력이 산재한 도로로 나가 차를 몰고 직접 찾아다니며 교민을 한곳으로 모았다. 공군C-130J 수송기, 다목적 공중급유기 KC-330, 최정예 특수요원인 공정통제사(CCT)와 '특전사 중의 특전사'로 불리는 육군707 대테러 특수임무대, 소말리아 해역 청해부대에 활동중이던 충무공이순신함이 수단과 인접국에 잇따라 파견돼 교민 대피를 지원했다. 현지 정보에 밝은 아랍에미리트(UAE) 협조를 얻어 수도 하르툼을 떠난 교민들은 동부 항구도시인 포트수단까지 육로 1천170㎞를 33시간 넘게 이동한 끝에 기다리고 있던 우리 군 수송기에 무사히 탑승했다.
전쟁이나 내란, 분쟁의 와중에 긴박하게 이뤄진 우리 교민의 철수 사례는 과거에도 있다. 2년 전인 2021년 8월, 탈레반 수중에 넘어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끝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교민 1명이 우리 외교관들과 함께 철수했다. 현지 사업장 때문에 여러 번의 철수 권고에도 더 남아 있겠다고 했던 이 교민은 아프간 상황 급변으로 철수를 결정했고, 우리 대사와 현지에 남아 있던 대사관 직원 2명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타고 아프간을 떠날 수 있었다. 며칠 뒤, 한국 정부와 협력한 400명에 가까운 아프가니스탄인을 국내로 이송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도 펼쳐졌다. '미라클(기적)'로 명명된 이 작전에는 이번과 같은 기종인 공군 C-130J(슈퍼 허큘리스) 수송기 2대와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 KC-330 1대 등 3대가 긴급 투입됐다.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이들은 이제 한국 땅에서 정착해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영화 '모가디슈'의 소재가 됐던 1991년 1월 소말리아 주재 남북 대사관 직원들의 동반 탈출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1990년 12월 말 반군의 공격과 정부군의 교전으로 모가디슈 도시 전체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우리 대사관저가 무장 괴한들로부터 습격받을 정도로 위험이 사방에서 옥죄어 왔다. 북한대사관은 8차례나 무장 강도의 침입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로를 찾다가 공항에서 당시 강신성 주소말리아 한국 대사와 김용수 북한 대사가 조우했다. 북측 대사관 직원들에게 우리 측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천신만고 끝에 남북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은 며칠 뒤 함께 소말리아를 탈출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정부가 현지까지 직접 구조기를 보내고 구출의 손길을 뻗칠 순 없었다. 현지 이탈리아대사관측 도움이 컸다. 숙명적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었던 게 남북 외교 현실이었지만, 이념과 체제를 넘어 해외에서 남북이 손을 잡은 사례로 꼽힌다.
1975년 월남(남베트남) 패망 당시 철수 작전은 아픔이 있다. 월남이 패망하기 직전인 그해 4월 초, 우리 정부는 현지에 남아 있던 교민과 대사관 직원 등을 철수시키기 위해 해군 LST(상륙함) 2척을 현지에 파견한 '십자성 작전'을 펼쳤다. 당시 이 작전으로 교민 등 1천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무사히 철수했다. 하지만, 월남 패망 때까지 남아 현지에서 활동하던 주월남 한국대사관 직원 중 이대용 공사 등 우리 외교관 3명은 이후 베트남 당국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5년 가까이 모진 수형생활을 했다. 교민 안전과 관련, 아픈 기억은 2004년 당시 이라크에 진출해 있던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 피랍 사건도 있다. 한국의 파병 철회를 요구하던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된 김씨는 끝내 구출되지 못했고, 이후 국회에서 국정조사특위가 구성돼 조사를 벌일 정도로 이 사건은 파장이 있었다.
세계 각 지역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분쟁이나 내전이 갑자기 발발하고 있고, 현지에 진출한 교민과 기업들도 갑작스러운 위험에 직면하곤 한다. 아픔과 성공이 교차한 탈출 역사 속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최소한 상황이 벌어지면 '내 뒤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점이다. 작전 '프라미스'는 이런 당연한 믿음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 물론, 우리 여행객이 사건·사고를 당했다가 현지공관의 적극적 대처나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불만이 여전히 가끔 들려오곤 있지만….
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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