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립소의 대중화, 그리고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선 행동주의자
위대한 가수이자 배우,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민권 운동가인 해리 벨라폰테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풍부한 표현력으로 ‘칼립소’를 널리 전파했고 전설로 남았다.
1950년대 국제적 명성을 얻었을 당시 세계 최초의 카리브 계 미국인 팝스타였고 그는 음악가로서, 그리고 활동가로서 인종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해리 벨라폰테는 달콤하면서도 끈끈한 서정적인 칼립소를 갈색 빛의 목소리로 불렀다.
서아프리카의 노동요에서 비롯된 칼립소는 아프리카 흑인들에게서 들여온 리듬구조와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들여온 파티 분위기, 여기에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멜로디가 혼재된 음악이었다.
대체로 칼립소는 외형적으로는 흥겹지만 해리 벨라폰테의 선조들이 농장에서 착취당하고 배에 짐을 나를 때 불렀던 노래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아픈 시대상을 그린 음악이라 할 수 있었다.
해리 벨라폰테로 인해 칼립소는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면서 유행하게 된다.
1927년 할렘에서 서인도제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해리 벨라폰테는 부모의 고향 자메이카에서도 8년 정도 유년시절을 보냈다.
군복무 이후 연예활동을 시작하면서 1954년 서인도 제도 전통 민요 모음집 [Mark Twain and other Folk Favorites]로 데뷔했다. 두 번째 앨범 [Belafonte]가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무엇보다 세 번째 앨범 [Calypso]가 무려 31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면서, 그리고 미국 내에서 100만장 이상 판매한 첫번째 앨범이 되면서 역사에 기록됐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당시 그 보다 더 크게 성공한 엔터테이너는 없었다.
앨범 제목에서부터 ‘칼립소’를 표방하고 있는 [Calypso]는 해리 벨라폰테의 시그니쳐 곡 ‘Day-O(The Banana Boat Song)’, 그리고 ‘Jamaica Farewell’ 등이 히트하면서 캐리비안 음악 열풍을 부추겼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기분 좋은 칼립소 스타일을 알리는 계기가 됐고 해리 벨라폰테는 이후에도 ‘Matilda’, ‘Danny Boy’ 같은 곡들을 성공시켰다.
참고로 그의 앨범 [Midnight Special]의 타이틀 곡 경우 밥 딜런이 커리어 최초로 녹음한 결과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밥 딜런은 앨범에서 하모니카를 녹음했다.
단순히 칼립소 만을 고수하지는 않았던 해리 벨라폰테는 경력 전반에 걸쳐 포크와 블루스 및 브로드웨이 뮤지컬 곡들을 녹음했다.
다른 장르의 곡들을 녹음할 때도 그의 목소리에는 쾌활함과 동시에 이민자, 흑인들의 비통한 역사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그는 항상 비애가 있는 소박한 인간의 영혼을 탁월하게 묘사해냈다.
자메이카 노동자들이 바나나를 배에 쌓을 때 부르는 노래 ‘Day-O(The Banana Boat Song)’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존재하지만 어떻게 보면 코믹한 요소도 있었고 때문에 영화 [비틀쥬스]에서는 코믹한 장면에 활용되기도 했다.
놀라운 음악적 성과 이외에도 연기 경력을 유지하면서 토니상과 흑인 최초 에미상 수상 등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한 해리 벨라폰테는 아프리카, 서인도제도 등 흑인 문화에 뿌리를 둔 음악을 해왔지만 정작 그의 팬 대부분은 백인들이었다.
게다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절망하기도 했다.
결국 해리 벨라폰테는 미국내 흑인의 권리와 아프리카의 빈곤, 전쟁 반대 및 에이즈 퇴치 등 수많은 것들과 싸우며 평생을 보냈다.
스스로 재단을 설립하면서 흑인의 지위 향상에 힘쓰는 사회활동가로 활약한 해리 벨라폰테는 마틴 루터 킹이 투옥됐을 당시 보석금을 내주기도 했고, 킹 목사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연설한 것으로 유명한 워싱턴 행진을 공동 조직, 진행하기도 했다.
미국 남부의 불법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는 단체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지지하는 취지에서 [Paradise in Gazankulu]라는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We Are the World’로 유명한 올스타 자선 프로젝트 ‘USA 포 아프리카’의 기획 또한 해리 벨라폰테가 영국의 ‘밴드 에이드’를 보고 처음 시작해 퀸시 존스와 마이클 잭슨에게 어레인지를 위탁한 것이었다. 그 무렵 유니세프의 친선 대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21세기에도 해리 벨라폰테는 활동가로서 왕성하게 얼굴을 내비쳤다.
조지 W. 부쉬 정권이 들어섰을 당시에는 흑인 각료들인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를 두고 백인 주인에게 최선을 다하는 노예라는 과격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공연과 영화 출연 또한 드물게 이어갔는데, 논쟁적인 스파이크 리의 2018년 작 [블랙클랜스맨] 같은 곳에서도 그의 정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3년 4월 25일, 맨하튼 자택에서 울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96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은 “미국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목소리를 사용한 미국인”이라며 그를 추모했다.
해리 벨라폰테가 만들어온 음악, 그리고 정의와 변화를 위한 투쟁은 전 세계 다양한 세대에게 영감을 줬고 죽기 직전까지 고령의 나이임에도 맨 앞에서 깃발을 들고 행진하려 했다. 그의 행진은 사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예술은 삶보다 큽니다. 나는 우리가 진실의 문지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 해리 벨라폰테
☞ 추천 음반
◆ Belafonte at Carnegie Hall (1959 / RCA Victor)
국내 중고 레코드가게, 골동품 가게를 가면 이따금씩 이 앨범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해리 벨라폰테의 카네기홀 실황을 담은 더블 앨범으로 그의 대부분의 히트곡들을 감상 가능하다.
오디오에 관심있는 이들 또한 한 번씩 언급하는 음반으로, 앨범이 성공하면서 이듬 해 후속 작인 [Belafonte Returns to Carnegie Hall]을 발표하기도 한다.
◆ Calypso (1956 / RCA Victor)
미국 음반시장에서 정규 앨범(LP)으로는 최초로 10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한 가수가 흑인이고 게다가 칼립소를 다룬 작품이라는 점이 의외였지만 역으로 당시 이 앨범 자체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앨범 전곡이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Calypso]는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미국 의회 도서관에 국가적 녹음 기록물로 등재됐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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