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8년후 갑자기 베스트셀러 "역주행에 어리둥절"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4. 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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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구의 증명' 최진영 인터뷰
2015년 발표했지만 판매 미미
2년 전부터 팔리는 '기현상'
1020에 입소문 퍼져 15만부
죽은 연인을 몸 안에 묻는
괴이한 애도가 엽기적?
사랑의 깊이 보여주는 은유
ⓒchoemore

아무도 그 이유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기이한 '사건'이 최근 서점가에서 벌어졌다. 출간된 지 한참 지난 177쪽짜리 짧은 소설이 차트를 역주행하더니 베스트셀러 10위권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

2015년 첫 출간 후 2년 차부터 매년 2000부쯤 나가던 이 소설은 2년 전 느닷없이 한 해 판매량 6000부를 넘어섰다. 그러더니 올해 1분기엔 5만부가 팔려나갔다. 현재까지 총판매량은 15만부. 1만부만 찍어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서점가에 이런 이변이 또 있을까. 주인공은 소설 '구의 증명'을 쓴 최진영 소설가(42). 제주에 거주하는 최 작가를 27일 서면으로 만났다.

'구의 증명' 리커버판

소설 '구의 증명'을 검색하면 한 단어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바로 '엽기'다. '구의 증명'은 설정만 놓고 보면 괴이하다. 소설 속 인물은 연인인 '구'와 '담'으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했고, 첫 경험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동행했다. 둘은 서로에게 과거였고, 현재였으며, 또 미래였다.

사채업자에게 거액의 빚을 진 구는 쫓기고 또 쫓긴다. 그러다 호스트바 웨이터로 내몰린다. 도망치던 구는 멍과 피가 가득한 얼굴로 발견된다. 숨이 멎은 채. 담은 구의 시체를 깨끗하게 닦으며 결심한다. 사랑하는 구를 땅에 묻을 수도, 불에 태울 수도 없다고. 담은 죽은 구의 손톱을, 머리카락을 삼키더니 급기야 살점을 먹기 시작한다.

"연인의 죽음까지 사랑하고 애도하는 방법으로 '먹는다'를 떠올렸어요. 먹는다는 건 사랑의 깊이와 절대성을 보여주는 은유에 가까워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면 저의 죽음과 비교할 수 없이 슬펐고, 정신이 사라지고 영혼이 떠난 자리에선 연인의 시체라도 너무 소중하니까요. 그런 마음이라면 구의 시체를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가상의 설정을 통해 인간의 이해를 도모하는 언어활동이 문학이라면 '구의 증명'은 몸의 영원성, 애도의 가능성을 질문하고 있다.

식인 행위는 야만적인 식장(食葬)으로 비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식인 행위는 현대사회가 개인을 대하는 방식이 더 야만적임을 증명하는 장치가 된다. '구의 증명'엔 평생 약자였던 구의 등에 박힌 고통의 편린이 촘촘하다. 그래서 담의 이상행동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구는 죽어서도 빚을 갚아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식인보다 야만적이고 잔인하지 않을까요. 가난 자체를 약점이나 잘못으로 여기는 가치관이나 시스템이 식인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도 소설에 담고자 했습니다."

'구의 증명'은 최 작가가 30대 중반에 쓴 소설이다. 한 편의 소설을 쓴 뒤 소설가는 그 세계를 떠나고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옛 소설이 뒤늦게 호응받는 기분은 어떨까. "처음엔 저도 어리둥절했어요. '이제 와서? 어째서?' 하지만 과거 별빛이 현재 제 눈에 담기는 것처럼, 독자의 눈에 제 글이 담기기까지 이만큼 시간이 필요했나 생각도 들어요. '구의 증명'은 좀 더 멀리 있는 별이었나 봐요."

'구의 증명'이 작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와 염미정의 사랑 관계를 떠올리게 해 역주행했다는 설도 있다. 구씨가 '호빠'에서 일했던 경력도 '구의 증명'의 구의 행적과 겹친다. 최 작가가 작년 12월 이상문학상을 받아 독보적인 여성 작가로 발돋움하면서 여성 독자들에게 절대적인 호응을 얻은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 작가의 수상소감을 보면 한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된다. '나는 나를 뿌리치려고 오랫동안 글을 썼다.'

"작가로 살다 보니 소설가가 된 이유를 질문 받았어요. 제 안에 답이 있던 게 아니라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나는 글쓰기를 통해 많은 것을 해소했구나,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더 많이 방황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요. 글을 쓸 땐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현대인의 사랑에 대해 써온 최 작가의 다음 '사랑 이야기'는 기존 소설과 얼마나 같고 다를까.

"저는 여전히 삶, 죽음, 애도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걸 모두 아우르는 단어가 사랑인 것 같아요. 다음 작품의 사랑도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로테스크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 사랑인가 의심할 수도 있을 거고요. 저는 언제나 그 의심의 경계선에서 한쪽만을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

그는 사랑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소설 쓰기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아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소설에서, 저는 그 가치를 지키고 싶습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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