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 백지신탁, 이쯤되면 일급기밀이죠?
이행한 경우만 관보 게재···나머지는 ‘깜깜이’
왜 안 했는지, 심사 타당했는지 알 방법도 없어
‘성인방송’ 등 일부 문제주식 보유도 계속
맡겼다가 돌려받는다면 ‘계속 보유’한 셈
3000만원 이상의 주식을 보유해 백지신탁 의무가 있는 고위공직자 중 실제 백지신탁을 했다고 신고한 사람은 10명 중 2명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식가액 상위 20위 중에서도 절반에 못 미치는 7명만이 백지신탁을 했다. 일부 공직자들은 문제가 됐던 주식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7일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가 지난달 말 공개된 입법·사법·행정부의 전·현직 고위공직자 2555명에 대한 재산공개 자료를 전수 분석한 결과 3000만원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685명 중 106명(15.5%)만 백지신탁 혹은 매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증권을 보유하거나 보유한 적이 있다고 신고한 공직자 1825명으로 범위를 넓혀 봐도 백지신탁을 한 공직자는 209명(11.5%)에 불과했다. 지난 3년간 관보 게재나 백지신탁 공고 등을 취합해 얻은 수치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본인 및 이해관계자(직계 가족 등)를 합쳐 3000만원이 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는 주식백지신탁 심사위원회에 직무관련성 심사를 청구해야 한다. 공무수행 과정에서 이해충돌 가능성이 있어 이를 막으려는 것이다. 심사에서 직무관련성이 있다고 판정되면, 해당 주식을 팔거나 은행·증권사에 백지신탁을 체결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백지신탁을 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 80% 이상의 공직자들은 백지신탁을 왜 안 해도 됐는지 심사 결과는 타당했는지 알 길은 없다. 백지신탁이나 매각을 했을 경우에만 관보에 그 사실이 게재될 뿐 직무관련성 심사는 비공개이기 때문이다. 백지신탁이나 매각을 했다고 신고한 경우에도 왜 나머지 주식들은 직무관련성이 인정되지 않았는지 판단 근거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경향신문은 시민들이 공직자의 주식 보유 현황을 감시할 수 있도록 재산공개 내역을 재구성해 공직자별, 종목별로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했다. 공직자들이 어떤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지, 특정 종목을 보유한 공직자들은 누구인지는 아래 주소의 인터랙티브 뉴스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3/stocks_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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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상위 20명 중 7명만 백지신탁
안 의원은 현재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인데 국회의원은 이처럼 소속 상임위원회와의 관련성만 없다면 대체로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받는다.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외통위)도 박정어학원, 아마존카 등의 주식 154억여 원의 주식을 신고했지만 백지신탁이나 매각을 하지 않았다. 백산금속, 부광개발 등 63억여 원에 달하는 주식을 신고한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보건복지위) 역시 백지신탁은 하지 않았다.
백지신탁을 하지 않은 일부 주식들은 문제의 소지도 있어 보였다. 120억여 원의 주식을 신고한 문헌일 구로구청장은 본인이 구로에서 운영하던 중소기업 문엔지니어링의 비상장주식 비중이 컸다. 구로구청 관계자는 “지난달 말 일부 주식이 직무관련성 ‘있음’ 판정을 통보 받아 관련 절차를 밟을 계획”이라고 전했다.
103억 원 상당의 주식을 신고한 류광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획조정실장은 대부분이 가족회사인 흥국 주식이었다. 다만 배우자가 엔젠바이오 2000주를 소유하고 있는 등 바이오·기술주에도 투자를 하고 있었다. 류 실장 측은 “배우자가 위탁한 투자 전문기관에서 사고판 것”이라며 “직무 관련성 심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류 실장의 경우 현재 간접투자의 경우 종목당 3000만원 미만이면 일괄적으로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어 적어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만 엔젠바이오의 사업보고서를 보면 과거 과기정통부 등 정부 과제도 맡은 적이 있는 만큼 소액·간접투자라 하더라도 관련 부처 핵심보직자로서 논란의 여지도 있다.
‘성인 방송’ 관련 주식, 강남구청장 외에 또 있어
조성명 서울 강남구청장은 인터넷 ‘성인 방송’ 관련 회사인 더이앤엠(THE E&M) 주식 보유로 논란이 됐지만 여전히 26만여 주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조 구청장은 문제가 됐던 대부업체 주식 역시 아직 5만 주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한 상태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지난해 직무관련성 심사를 청구했지만, 아직까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결과와 별개로 문제가 된 주식을 처분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주식 종목 전수분석 결과 조 구청장 외에도 더이앤엠 주식을 상당량 갖고 있는 공직자가 2명 더 있었다. 이욱희 충북도의회 의원은 본인과 배우자를 합쳐 더이앤엠 주식 21만6847주를 보유 중이다. 설명을 듣고자 했지만 이 의원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2만8082주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던 조성태 충북도의회 의원은 “손해를 감수하고 모두 처분했으며 변동사항을 새롭게 신고했다”고 밝혔다.
국토교통위 소속으로 맥쿼리인프라 주식 보유가 논란이 됐던 김희국 국민의힘 의원의 경우에도 여전히 배우자가 3만5887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김 의원은 직무관련성 심사에서 문제없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입장이다. 국회공보에 따르면 김 의원은 2020년 10월 자신이 보유한 쌍용양회, 현대건설 등의 주식은 매각했다고 신고했는데 직무관련성 평가에 따라 이들 주식을 매각한 것인지, 그렇다면 왜 맥쿼리인프라는 되고 이들 주식은 안 되는지 알 길은 없다.
이처럼 직무관련성 심사가 제때 이뤄지는지, 그 결과의 타당성은 무엇인지가 의심 가는 경우가 많다. 조성명 구청장이나 류광준 실장은 직무관련성 심사를 청구했다고 밝혔지만, 따져 보면 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답신을 받지 못한 상황이다. 심사 기간이 늘어지면서 결국 임기의 상당 기간 동안 문제가 되는 주식을 보유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직무관련성 심사는 9명으로 구성된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 심사위원회에서 실시하는데, 공개 대상만도 2000명이 넘는 공직자들을 모두 제대로 심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백지신탁 의무위반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해 보니 2021년 기준으로 주식 매각·백지신탁 신고지연이 34건, 직무관련성 심사청구 지연이 87건에 달했다.
현재로선 백지신탁을 했다는 사실이 관보에 공고되거나 본인이 재산공개 때 명시하지 않으면 직무관련성 심사를 청구했거나 심사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경우의 수는 다양한데, 심사를 받기 전에 처분했을 수도 있고 심사를 받았는데 관련성 없다고 해서 보유 가능한 경우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서휘원 경실련 사회정책국 팀장은 “심사위원회 발언과 같은 구체적 내용도 아닌 심사 기준과 심사 결과를 공개하라는 것”이라면서 “심사 내역을 공개하면 의무 불이행 의혹이나 심사청구 지연 문제 등을 해소할 수 있는데 공직자윤리법에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비공개를 고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지신탁해도 나중에 돌려받으면 그만?
443억여 원으로 주식 보유가액 전체 2위인 전봉민 국민의힘 의원은 동수토건 5만8300주를 백지신탁하고, 이진주택 1만주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수탁기관인 농협은행 홈페이지 주식백지신탁 내역을 확인해 보면 4월12일 기준으로는 아직 농협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등재돼 있다.
백지신탁을 한 지 더 오래됐지만 아직 팔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국회의원들도 많았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6년 7월에 하우징텐 주식을 백지신탁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다.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2019년 7월),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2020년 9월),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2022년 8월) 등도 마찬가지다.
법령상 백지신탁을 맡은 금융기관은 이를 60일 이내에 처분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기한 내 처분하기 어려우면 30일 연장이 가능하며 연장 횟수에도 제한이 없다. 백지신탁을 했더라도 주식이 팔리지 않으면 임기를 마치고 돌려받는다.
이렇게 되면 주식을 사실상 보유한 채 업무를 수행하는 셈이어서 이해충돌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백지신탁 제도가 이름뿐인 껍데기가 되는 셈이다. 특히 비상장주식은 잘 처분되지 않기 때문에 임기를 마치고 그대로 돌려받을 가능성이 크다. 비상장주식을 가진 공직자 수는 상당수다. 합쳐서 1000주 이상을 가진 이들만도 공개대상 공직자 전체의 13.4%인 342명이나 됐다.
백지신탁을 맡은 금융기관이 주식을 제대로 매각 처분하고 있는지 감시할 길도 없다. 현재 금융기관 중 농협은행만 위탁 주식백지신탁 내역을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있다. 공직자의 백지신탁 공고를 보면 농협 외에도 미래에셋증권 등에 맡기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들 금융기관은 신탁 내역을 공고하지 않는다. 공직자윤리법은 주식 백지신탁 후 처분이 완료될 때까지 관련 직무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참여연대는 2020년 자치단체장과 기관장 등 최소 10명의 공직자가 백지신탁한 주식이 처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직무를 수행해왔다고 발표했다. 특히 박덕흠 의원은 2014년 백지신탁한 원하종합건설(현 이준종합건설) 등 100억원이 넘는 건설회사 주식이 매각되지 않았음에도 5년 동안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드러나 문제가 됐다. 이 기간 그의 가족회사가 수천억 원대 공사비와 기술사용료 수입을 올렸다는 보도가 나와 이해충돌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 의원은 2014년, 2020년 두 차례 백지신탁을 했지만 원하건설, 이준종합건설 등의 주식이 여전히 매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오히려 백지신탁 ‘무력화’ 나서는 정부
최근에는 백지신탁을 하라는 결정 자체에 불복하는 사례들도 나오고 있다. 박성근 국무총리비서실장은 배우자의 회사 지분을 백지신탁하라는 인사혁신처 결정이 재산권 침해라며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지난해 9월 재산공개 당시 신고한 주식 102억여 원 중 80억여 원이 서희건설 회장의 장녀이자 이 회사의 사내이사인 배우자의 주식이었다.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 역시 배우자가 보유한 8억 원대의 바이오회사 주식을 처분하라는 정부 결정이 재산권 침해라며 소송을 벌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되레 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유능한 인재’의 공직 진출을 막는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김승호 인사혁신처장은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제도가 부당하다고 일부 공직자가 말하고 있고, 이 제도가 공직에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측면도 있어서 연구용역을 맡겨 전반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휘원 팀장은 “고위공직자들이 직무에 전념하도록 한 당초 제도의 취지를 생각하면 백지신탁 기준을 완화하거나 예외를 두는 방향이 우려스럽다”면서 “직무관련성 심사 정보를 공개하고, 비상장주식 백지신탁의 실효성을 강화하는 등의 제도 보완도 함께 이뤄져야 균형이 맞다”고 말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이수민 기자 watermin@kyunghyang.com, 박채움 기자 cuc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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