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와 울산에서 함께 피는 동백, ‘꽃의 디아스포라’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오색꽃을 피우는 희귀품종 임란 때 반출
교토 한 절 명물로 400년간 뿌리내려
‘귀환운동’ 끝에 후세목 고향에 돌아와
울산시청 마당서 ‘울산 동백’으로 “개화”
왜장 가토 기요마사, 도요토미에게 진상
“연대 안 맞다” 한국 전래설 부정 시각도
‘낳은 정 기른 정’ 상호 이해 마음 소중
“기구한 운명” 평화 상징으로 승화돼야
교토시 북구 기타노하쿠바이초에 곤요잔지조인(곤양산지장원)이란 작은 절이 있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지금의 자리에 재건된 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절은 본명보다는 ‘동백절’(椿寺)이라는 뜻의 ‘쓰바키데라’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쓰바키데라의 동백은 동백나무가 지천인 일본 열도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오색동백’이다. 일반적인 진홍빛뿐만 아니라, 흰색·분홍색 등이 섞인 여러 색깔의 꽃을 피우는 희귀품종이다. 꽃잎도 홑잎이 아니라 겹잎이고, 꽃이 질 때는 뭉치째로 떨어지는 보통의 동백과는 달리 꽃잎이 낱장으로 떨어져서 ‘오색팔중산춘’(五色八重散椿, 고시키야에치리쓰바키)이라는 이 동백만의 특별한 이름을 얻었다.
이 쓰바키데라의 오색팔중산춘이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그 희귀성 때문만은 아니다. 한-일 간 애증 어린 역사가 이 아름다운 꽃에도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오색팔중산춘의 본래 자생지는 우리나라 동남부 도시 울산이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와” 교토에 뿌리를 내렸다. 원산지 울산에서는 맥이 끊기고 교토에서만 꽃을 피우던 동백이 30년 전 한국에도 다시 심어져 꽃을 피우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한 아버지, 어머니를 가진 2세, 3세목들이 400여년만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함께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한·일 양국 사람들에게는 일말의 감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설정이 아닌가.
쓰바키데라의 오색팔중산춘은 ‘공식적’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절에기증한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 기증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의 한 사람인 가토 기요마사다. 가토가 오색팔중산춘을 일본으로 반출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던 1598년 무렵으로 생각된다.
가토는 정유재란 시기에 주둔했던 울산에서 이 희귀 동백을 발견하고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동백은 장수를 상징한다)하기 위해 일본에 가져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와 인연이 깊은 이 절에 옮겨져 정성 어린 돌봄을 받은 끝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권력자의 후광에다 진귀한 오색꽃을 피워 절의 이름까지 바꾸게 한 울산의 동백나무는 먼 이국땅에서 천수를 다하고 1983년 애석하게 고사했다고 한다. 현재의 오색팔중산춘은 꺾꽂이로 증식한 ‘ 후세목’으로 수령이 120년 이상 되었다고 하니, 19세기 후반 어느 시기에 주목의 고사에 대비한 꺾꽂이 증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오색팔중산춘이 1992년 ‘고향’에 돌아오게 된 것은 전쟁과 식민지 시대의 한이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열정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989년 일본 교토를 여행하던 최종두 울산예총지부장 일행이 쓰바키데라의 동백나무에 얽힌 ‘기구한’ 사연을 알게 되면서 울산 동백의 ‘귀환운동’이 시작된다.
오색팔중산춘이 독점 상표나 다름없는 쓰바키데라 쪽이 ‘재반출’을 한사코 거부해 운동은 지지부진했으나, 당시 일본 불교와 교류가 깊었던 부산 자비사 박삼중 주지가 한일불교복지협회라는 단체를 통해 쓰바키데라 쪽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당시 쓰바키데라 쪽이 박 스님에게 건넨 오색팔중산춘은 2대 후세목에서 다시 가지를 친 3세목 3그루. 40~50㎝ 크기의 어린나무는 1992년 5월 성대한 기념식과 함께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경남 사천의 조명군총(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결전을 벌이다 희생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무덤), 그리고 울산시청에 한 그루씩 심어졌으나, 울산시청 마당(초록원)에 심은 것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어렵사리 자생지에 돌아와 뿌리를 내린 오색팔중산춘은 울산시청의 정성 어린 돌봄 끝에 귀향 5년째부터 꽃을 피웠다. 울산시청에서 오색팔중산춘을 전담 관리하는 장정대 주무관과 최근 연락이 닿았는데, 친절하게도 활짝 꽃을 피운 울산의 3세목 사진을 직접 찍어서 보내주었고, 필자도 답례로 쓰바키데라의 2세목 사진을 보냈다. 장 주무관은 “한국에 돌아온 3그루 중 우리 것만 살았는데, 울산이 고향이라서 그랬나 싶다”며 “30년 전 교토의 절에서 기증받은 것이란 이야기만 들었는데 직접 사진으로 보니 우리도 더 잘 가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장 주무관에 따르면, 울산에 온 3세목에서 다시 가지를 친 4세대 나무들이 울산시청농업기술센터 에서 자라고 있는데, 최근에 그중 잘 자란 10그루를 3세목 옆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장차 동산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하니 머지않아 울산에 오색팔중산춘으로 무성한 동백꽃동산을 보게 될 것 같다.
가토가 울산에서 오색팔중산춘을 일본에 가져왔다는 전승이 과거 우리나라에 오색동백이 자생했다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래서인지 오색팔중산춘의 한국 도래설에 의문을 표시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절 안내문에도 가토에 대한 이야기는 더는 하지 않는다. 일본 원산설을 주장하고 싶거나, 한국인이 언젠가 나무를 통째로 가져가려 할지 모른다는 일종의 ‘혐한’이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 도래설을 부정하는 근거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요토미가 나무를 절에 기증한 계기가 되었다는 기타노다회(茶會)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7년에 있었던 행사라는 것, 가토가 전쟁이 끝나고 교토에 돌아왔을 때는 도요토미가 이미 죽은 뒤였다는 것 등이 꼽힌다. 즉 쓰바키데라의 오색팔중산춘은 도요토미와 관계가 있지, 가토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시점으로만 보면 확실히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그런데 필자는 우연히 다른 책에서 교토의 게코지(화광사)라는 절에 ‘오색동백’이 유명했다는 이야 기를 발견했다. 교토시 중심부 데미즈라는 동네에 ‘7가지 불가사의’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색동백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게코지는 도요토미의 후원으로 지어진 절이고, 경내에는 쓰바키데라처럼 가토 기요마사 후손 일족의 묘비가 안치돼 있다. 이는 오색팔중산춘이 도요토미와 가토의 군신 관계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방증한다.
가토가 오색팔중산춘을 일본에 가져왔을 때는 도요토미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나무는 두 사람과 인연이 깊은 쓰바키데라에 맡겨졌고, 절은 권력자 가문의 후광을 업기 위해 점차 가토보다는 도요토미와의 인연을 앞세우면서 가토 대신 도요토미 기증설이 생겨났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흩어져 살게 된 운명을 뜻할 때 종종 사용한다. 꽃에도 디아스포라의 운명이 있을까? 그곳이 어디라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면 그곳이 그 꽃의 자리가 아닌가?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런 자리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울산 동백이 쓰바키데라에 갔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을 ‘빼앗긴 꽃의 귀환’으로 여긴 당시 언론보도는 침략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국인에게는 결코 과장된 수사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이 400년도 넘게 정성을 기울여 가꾸고 후손을 키운 나무를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 또한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양쪽이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손을 잡은 끝에 후손목들이 본래의 자생지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있다. 긴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인간의 역사도 순환하는 자연의 일부이다. 꽃의 디아스포라를 평화의 상징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일이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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