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과학은 없다]④ 연구소 기업도 해외로 눈 돌린다…활기 잃은 50살 ‘대덕특구’

대전=이종현 기자 2023. 4. 2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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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지방화 이끈 대덕특구… 올해 50주년
특구 지정 후 기업 수·연구 인력 등 늘었지만
낙후된 인프라·인력 공급 부족 등으로 성장 한계 뚜렷

정부가 제1차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을 발표하며 지역의 과학 생태계 조성에 나선 지 올해로 25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서 예산과 인력 같은 지표를 보면 수도권 쏠림 현상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지역의 과학기술 혁신 역량을 점검하고, 수도권과 지역이 함께 성장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 봤다.[편집자 주]

투자자들도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에 올라올 생각이 없냐고. 저는 아직은 대전에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최근에는 해외로 이전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북중미 지역의 한 산업단지에서 계속 자기들 단지에 이전하라고 연락이 오는데, 젊고 유능한 인력을 한국보다 저렴한 인건비로 쓸 수 있고, 매출로 이어지는 테스트 베드까지 제공한다고 하니 사실 이렇게 좋은 제안이면 대전에 있을 이유가 없긴 하니까요.

김영재 트렌토시스템즈 대표

대덕연구개발특구(대덕특구)가 올해로 출범 50주년을 맞았다. 대전 유성구 일대에 조성된 대덕특구는 1973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시작으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과 기업 연구소, 대학 등이 모이며 ‘대한민국 과학기술 1번지’로 불렸다. 원래는 대덕연구단지로 불리다 2005년에 연구개발특구법이 제정되면서 대덕특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대덕특구는 국내 첫 연구개발특구이자 과학기술 역량이 결집된 곳으로 많은 성과를 냈다. 수도권에 집중된 과학기술 인프라와 인력을 그나마 지방으로 분산시킨 것도 대덕특구의 공이 크다. 2005년 특구 지정 때와 비교해 대덕특구의 기업은 687개에서 2356개(2021년 말)로 늘었다. 같은 기간 연구개발 인력은 1만6759명에서 3만8716명으로 늘었다. 총 연구개발비는 1조8131억1700만원에서 7조7129억4700만원, 국내특허등록 수는 2만2625건에서 8만26건으로 늘었다. 대부분의 지표가 3~4배씩 증가했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는 지난해 대전을 세계 20위의 과학기술클러스터로 꼽았다. 세계 순위 4위의 서울에 이어 국내 클러스터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순위다.

대덕특구는 이처럼 명실상부 지방 과학기술 혁신을 이끌어 온 주역이지만, 초반에 비해 활기를 잃고 있다는 회의적인 평가도 있다.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렇다 할 변화나 혁신이 없다보니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는 시선이다.

그래픽=손민균

대덕특구의 성장을 이끈 주역 중 하나는 연구소 기업이다. 연구소 기업은 공공연구기관의 기술을 사업화하기 위해 설립된 기업을 말한다. 출연연이나 대학이 만든 기술이 특허나 논문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부가가치를 내기 위해선 기술이전을 통한 사업화가 필수다. 연구소 기업은 출연연이 개발한 기술을 상용화 수준까지 끌어올려서 부가가치를 만들고 매출과 고용을 창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2021년 말 기준으로 대덕특구에는 404개의 연구소 기업이 있다. 5개 연구개발특구 중 단연 1등이다.

그런데 이 연구소 기업 사이에서 대덕특구의 매력이 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온다. 트렌토시스템즈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투자를 하면서 만든 연구소 기업이다. LG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김영재 대표가 KISTI와 함께 손을 잡고 2020년 11월 만들었다. 트렌토시스템즈는 5세대(5G)와 6세대(6G) 통신 네트워크 구축에 필수인 SDN(소프트웨어 정의 네트워크) 기반의 네트워크 슬라이싱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다. 차세대 통신망 시장의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전망도 밝지만, 대덕특구에 있는 회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영재 대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드냐고 묻자 김 대표는 돈과 사람이라고 답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기술과 제품이 있어도 판매가 어렵다. 이제 막 나온 제품이고 신생 기업이라 우리 제품의 경쟁력을 증명할 수 있는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이다. 대덕특구에선 연구 과제가 많기 때문에 연구비를 타면 당장의 인건비나 고정비 해결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런 연구비는 매출로 잡히지 않는다. 매출로 잡히지 않는 걸 실적이라고 이야기할 순 없으니 레퍼런스를 만드는 게 쉽지 않다. 단순히 연구과제가 아니라 매출로 이어지는 실증사업을 많이 해줘야 특구에 있는 신생 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사람은 더 심각한 문제다. 다른 지방에 비해 과학기술 인력이 그나마 많다는 대전이지만, 김 대표는 일할 사람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한다. 김 대표는 “회사에 필요한 인력이 100이라면 지금은 50밖에 없는 수준”이라며 “우리는 신생 기업이지만 상황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연봉이나 복지혜택도 좋은 편인데 그래도 안 온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비슷한 업종의 기업보다 연봉을 1200만원을 높여서 제안했지만 거절 당한 사례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거절한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니 지방은 안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김 대표는 최근 해외 이전도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이전하는 것보다 아예 해외로 옮기는 게 더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최근 들어 북중미 지역의 산업단지에서 이전하라는 연락이 계속해서 온다”며 “산업단지 주변에 있는 대학에서 젊은 인재를 바로 쓸 수 있게 도와주고, 우리 기술을 실제로 써볼 수 있는 실증용 테스트베드도 지원해준다고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고 말했다. 한국 인력은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챗GPT 같은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으면 개발인력 수준도 한국과 해외가 별 차이가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대덕에 있지만 전국구만 상대하는 대학·출연연

현장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대덕특구가 처음 출범한 의도와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덕특구는 출연연을 비롯한 공공연구기관과 기업이 힘을 합쳐 연구성과를 실제 사업화로 확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교육기관이 여기에 필요한 인력을 뒷받침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 출연연이나 KAIST 같은 교육기관이 대덕특구에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지적이 적잖게 나오고 있다. 출연연과 KAIST가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기관과 교육기관이고 대전을 넘어 한국의 경쟁력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성공 모델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대덕특구가 오히려 배제되고 있다는 평가다.

대덕특구 입주 기업 모임인 대덕이노폴리스벤처협회의 김병순 회장(나노하이테크 대표)은 “출연연이 개발해서 특허까지 낸 기술은 보통 TRL(기술완성수준)이 5~6 정도에 불과하다. 사업화까지 이어가려면 이 TRL을 8 이상으로는 끌어올려야 하는데, 출연연 연구자들은 특허를 기업에 이전해준 뒤에 TRL을 끌어올리는 건 남의 일 보듯이 한다”고 지적했다.

고영주 대전과학산업진흥원(DISTEP) 원장은 “출연연과 지역 대학이 국비 사업을 따올 생각만 하다보니 지역의 사업이나 이슈에 관심이 없다”며 “출연연이 기업과 공동 연구를 한다고 해도 대덕특구에 있는 기업보다는 수도권에 본사가 있는 대기업만 주로 매칭을 한다”고 말했다. 고 원장은 “출연연 연구자들이 ‘전국구’라는 생각이 지나친 나머지 현재 뿌리를 두고 있는 대덕특구의 기업들과 협력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대덕특구의 한 상가 건물에 임대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최정석 기자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식의 전환’처럼 겉만 그럴듯한 말보다 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출연연이나 대학의 연구자들이 지역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고 사업화를 돕게 할 만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승호 대덕이노폴리스벤처협회 사무국장은 “연구자가 개발한 기술이 기업에 이전돼서 큰 수익이 나더라도 정작 해당 연구자는 돈을 벌 수가 없는 구조”라며 “기업과 연구자가 계약해서 수익의 일정 부분을 연구자에게 인센티브로 주거나 스톡옵션을 주는 등 확실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규제 탓에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고 원장도 “출연연 연구자나 대학의 교수 입장에선 특허가 사업화가 되든 안 되든 먹고 사는 데 문제도 없고, 특별히 이득이 될 것도 없다”며 “학·연은 기술 사업화에 의욕이 없고 기업(산)은 노하우가 없는 구조인데 이걸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덕특구는 대전 안의 외딴 섬… 노후 인프라도 심각

대덕특구의 인프라가 노후화되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다. 단지가 조성되고 2005년 특구에 지정되면서 제도적인 지원은 늘었지만, 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열악한 인프라가 문제다. 실제로 대덕특구를 가보면 공공기관 특유의 잿빛 5~6층짜리 건물들이 철제 담장을 경계로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건물만 오래된 게 아니라 연구자들이 갈 만한 식당이나 휴식을 취할 놀거리도 없다.

출연연 연구자들은 “밥 한 끼 제대로 먹으려면 차로 10~15분은 가야 된다”고 말한다. 대덕특구에 입주한 한 기업 대표는 “도로 사정도 열악해서 한 번 막히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며 “구도심인 대전역까지 차로 40분은 걸리는 게 일상”이라고 말했다.

대덕특구에서 20년째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있는 A씨는 “대덕특구는 단지가 너무 뿔뿔이 흩어져 있다 보니 특성화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며 “기업이 일할 수 있는 부지 자체가 적다 보니 대덕특구에서 시작한 기업들도 성장에 한계를 느껴서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대전시는 작년 12월 대덕특구 재창조위원회를 열고 '대덕특구 재창조 종합이행계획'을 확정했다. 대덕특구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는 등 다양한 방안이 담겨 있지만, 중장기적인 대책이 대부분이라는 지적도 있다. /대전시

대전시와 대덕특구 측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대전시가 작년 말 만든 ‘대덕특구 재창조 종합이행계획’을 보면 대덕특구의 한계점으로 ‘낮은 토지이용 효율 및 부족한 기업 활동 공간’ ‘넓은 면적 및 많은 종사자 수에 비해 주거·문화·편의시설 부족’ 등이 나온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전시가 대덕특구 용적률을 높이고, 새로운 주택을 공급하는 등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인 대책들이라 당장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한선희 대전시 전략사업추진실장은 지난 20일 DISTEP 대회의실에서 열린 ‘과학수도대전 특별법 추진 토론회’에 참석해 “대전 전체가 1억6000만평인데 이 중 대덕특구가 2000만평으로 대덕특구가 대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은 편”이라며 “문제는 대덕특구의 상당부분이 녹지여서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탓에 80%가 개발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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