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목적지 감출 거면 왜 호출이 필요한가

이균성 논설위원 2023. 4. 2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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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성의 溫技] 목적지는 마녀가 아니다

(지디넷코리아=이균성 논설위원)국회가 논란 끝에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 심사를 잠정 연기한 것은 바람직한 판단으로 보인다. 이 개정안은 택시 플랫폼에서 목적지 표시를 전면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승객 가려 받기’를 제도적으로 막자”는 취지다. 이에 대해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 IT 단체 7곳은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 법이 “모빌리티 벤처기업의 혁신과 창의성을 가로 막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사실 승객 현재 위치와 함께 택시 호출 앱이 제공하는 핵심 정보다. 택시 기사에게는 어쩌면 승객 위치보다 목적지가 더 중요한 정보다. 목적지에 따라 택시 기사의 시간당 노동의 대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는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 택시 호출 앱은 IT 기술을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승객과 택시기사를 매칭하는 일은 그래서 현재 위치와 함께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택시 호출 앱은 본질적으로 기사가 승객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솔루션이다. 이 선택 행위로 인해 택시 기사의 노동 생산성은 높아지고, 승객은 길거리가 아니라 출발지에서 택시를 탈 수 있게 됐다. 호출(승객의 수요)과 호응(택시 기사의 선택)의 시너지 효과가 그것이다. 그런데 왜 이 당연한 선택 행위는 ‘가려 받기’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법으로 규제되어야 할 나쁜 짓으로 여겨지게 된 것일까.

간단하다. 선택되지 못한 수요자가 있는 탓이다. 누가 선택되지 못하는가. 택시 기사의 시간당 노동대가를 낮추는 수요자다. 가까운 거리나 막힌 길을 가야 하는 수요자가 주로 거기에 해당될 터이다. 입법을 추진하였던 의원들은 이런 수요자의 불편을 해소해주고 싶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런 불편을 낳았던 유일한 주범을 목적지로 지목한 셈이다. 하지만 이 진단은 너무나 피상적인 것일 수 있다.

이 진단이 일부 수요자의 불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목적지를 표시하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목적지가 택시 앱을 이용하는 기사들이 알고 싶어 하는 핵심정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목적지를 표시하지 않을 때 앱을 써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 결과는 뻔하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

과거에 어땠는가. 택시 호출 앱은 없었다. 지금 이 사업을 영위하는 모빌리티 회사들은 그러므로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 택시를 타려는 사람들은 다시 모두 길거리에 나서서 우연히 오는 택시를 보고 손을 들어야 할 테다. 택시 창문이 내려지면 목적지를 말하고 갈지 말지를 협상해야 한다. 승차 거부는 현행법 위반이지만 거의 모든 택시 기사가 그럴 것이기 때문에 이 법은 사실상은 유명무실하다.

택시 기사가 승차를 거부하면 어떻게 하는가. 떠나는 택시 뒤꽁무니에 실컷 욕설을 퍼붓고 다음 택시를 기다려야 한다. 그 택시도 승차 거부를 하면. 욕하는 거 말고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결국 택시를 타려면 ‘따블’이든 ‘따따블’이든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다. 택시 기사가 원하는 시간당 노동의 대가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이런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일부 승객의 불편을 해결한 건가.

이 짧은 상상만으로도 택시 호출 앱의 ‘목적지 미표시’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하다. 어설픈 진단으로 오로지 ‘목적지’ 만을 ‘마녀’로 취급한 것에 불과하다. 왜 이런 설익은 진단이 나오는 것일까.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쾌도난마(快刀亂麻) 식으로 풀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쾌도난마식 수술은 어떤 경우 말끔한 대책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엉뚱한 결과만 불러올 수 있다.

낙후된 택시산업과 소비자 편의를 진실로 고민한다면 관점을 크게 바꿔볼 필요가 있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자면 이렇다. 운송업의 ‘사회적 노동시간’과 그에 대한 가치평가는 제대로 돼 있는가. 무슨 이야긴가. 운송 노동자의 노동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면 서비스의 개선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질 좋은 서비스를 기대한다면 비용도 걸맞아야 한다.

택시로 큰돈 벌었다는 사람 본 적이 없다. 승진했다는 사람도 만난 적 없다. 편히 먹고 산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고단한 삶일 뿐이다. 배운 일이,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니 저소득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럴 거면 이용하지 마라. 과거의 승차 거부와 현재의 호출 선택은 그들의 가냘픈 밥이다. 그래야 겨우 먹고 산다. 입법하는 자는 이런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이균성 논설위원(sereno@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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