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디자이너는 공유오피스에 왜 위스키를 준비했을까?
편집자주
스타트업엔 유난히 다양한 C레벨(분야별 최고 책임자)이 있습니다. 강점을 가지려는 분야에 최고 책임자를 두기 때문입니다. C레벨을 보면 스타트업의 지향점도 한 눈에 알 수 있죠. 스타트업을 취재하는 이현주 기자가 한 달에 두 번, 개성 넘치는 C레벨들을 만나 그들의 비전과 고민을 듣고 독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⑩정형석 알리콘 CDO
한국영화 '소공녀'(2018년)의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일당 4만5,000원을 벌지만 매일 위스키바에서 1만2,000원짜리 위스키 한 잔을 마신다. 위스키는 미소에게 육체노동의 고단함을 덜고, 지나간 하루를 돌이켜보며 안식을 제공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월세가 5만원 오르자 위스키를 포기하는 게 대신, 차라리 방을 빼는 선택을 할 정도로 그의 삶에서 위스키는 치유제와 같다.
독주인 '위스키'와 취기를 허락하지 않는 '일터'. 뭔가 합쳐질 수 없는 두 이질적 요소를 결합해 스타트업의 무기로 삼은 사례가 있다. 일과 내내 쌓인 피로를 알코올 40% 술로 단숨에 풀고, 하루의 후반전을 시작해 보자는 것. 분산 오피스 서비스 '집무실'을 운영하는 알리콘의 정형석 최고디자인책임자(Chief Design Officer·CDO)가 꿈꾸고 설계하는 '사무실'이 바로 그런 곳이다. 주거지와 가까운 근무공간을 찾는 고객들에게 무료로 위스키를 제공하는 파격적인 발상이 그의 작품이다.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한 뒤 8년간 브랜드 디자인 에이전시 '엔스파이어'를 이끌었던 정 CDO는 2020년 알리콘에 합류해 서울 중구 정동에 집무실 1호점을 냈다. '집 근처 사무실'을 표방하는 집무실은 현재 서울대, 일산, 목동, 분당 등 수도권 일대 지하철역 인근에 9호점까지 개점했다. 과거 철도 하역장이었던 곳을 업무공간으로 바꾼 집무실 왕십리점에서 정 CDO를 만나 '일 잘 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법을 들어봤다.
-왕십리점은 거대한 기차 또는 기차역을 연상하게 합니다. 어떤 의도로 이런 공간이 탄생한 것인가요?
"디자인 컨셉을 정할 때 해당 지역이나 사건에서 실마리를 얻습니다. 왕십리점은 과거에 철도 하역장이었던 점에 착안했습니다. 집무실 전체 공간이 마치 기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한쪽 벽면에는 기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영상을 틀었죠.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바 스테이지(Bar stage)는 매표소를 닮았습니다. 회의실은 기차 객실칸에서 개념을 빌려왔습니다. 마주 앉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어떤 게 있을까 하다가 퍼뜩 객실칸이 떠올랐습니다. 기차에서 사람들은 함께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잖아요. 과거 전화국이었던 일산점에는 2000년대까지 약 10만명 사이에서 통신 장비 역할을 했던 전자 교환기가 오브제(물체를 원래 자리에서 분리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로 놓여있습니다."
-회사가 아닌 곳에서 원격근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경쟁사는 많습니다. 집무실은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승부를 건 것인가요?
"시각적으로 사용자들을 현혹하려 하거나, 일부러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에 집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의도는 없었어요. 오히려 공간에서 느끼는 '경험'에 집중했죠. 예를 들어 눈을 피로하게 하는 직접 조명이나 거슬리는 기계 소음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습니다. 앉는 자세나 좌석의 각도·배치도 각종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계산했습니다. 마주앉게 할지, 삼각형으로 앉게 할지 등 어떻게 하면 대화가 더 잘될 수 있는지 등을 연구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 갓등을 올려놓는 것도 그 결과죠. 이런 요소들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백색 형광등 아래서 회를 먹는 것과 이자카야에서 회를 먹는 것을 비교해 보면 대화의 깊이가 달라지거든요."
-집무실 전에는 복합문화공간이나 대기업들의 상업공간 브랜드에 관여하셨는데요, 이런 공간들과 분산 오피스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집무실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단순히 분산 오피스 브랜드를 만드는 것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리콘의 비전 자체가 '인류가 일하는 방식을 혁신한다'는 것이 거든요. '일이 잘되는 경험'을 탐구하고 이것을 실체화시키는 게 관건이고, 공간은 이 일을 거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제가 상업공간을 브랜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봐요. 지금은 생활양식, 즉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겁니다."
-'일 잘 되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선 어떤 전략이 필요한 건가요?
"저는 인상(印象)이라는 말에 기본값을 더한 '인상값'이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보여지는 것만으로 이해가 되는 비언어적인 요소를 말하죠. 예를 들어 제가 이렇게 머리를 밀고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일종의 인상값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저희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도 사람들이 즉각 이해할 수 있는 인상값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이해하는 것에 반응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내죠. 따라서 디자인의 최종 결과물이 어떤 인상과 메시지를 전달하면 좋을지 고객과 깊게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팀 내부적으로도 활발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목표로 하는 설정값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 자본, 시장 상황 등을 고려한 범위 내에서 어떤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을지 꼼꼼하게 살펴야 하죠."
-고객들에게 위스키를 제공하는 것도 '인상값'과 관련이 있나요?
"집무실에 오는 사용자들은 누구나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무료로 위스키를 마실 수 있습니다. 위스키의 '인상값'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취입니다. 오늘 성취한 것들을 스스로 축하하고, 음미하고 곱씹으라는 의도입니다."
-CDO의 역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1990년대에는 최고마케팅책임자(CMO)의 역할이 컸다면, 2010년대 이후 CDO가 중요한 최고책임자로 부상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케팅은 이미 제품과 서비스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맥락을 이야기하거나, 목표로 하는 대상을 정해서 제품과 서비스를 알리는 역할이죠. 그런데 디자인은 제품과 서비스의 본질을 만드는 일이라는데서 마케팅과 차이가 있습니다. 가치를 실현하는 작업이기도 하죠. 최근 디자인 책임자 역할이 부각된 것은 대부분의 제품과 서비스의 질이 이미 상향평준화된 결과일 것입니다. 질은 담보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치가 더 발현되는 제품들이 살아남고 선택을 받게 되겠죠. 디자인은 그 가치가 발현될 수 있도록 표현해주는 좋은 도구입니다."
-스타트업에도 CDO가 필요할까요?
"사업을 확장하는 초창기라면 강력한 디자인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일정 수준 이상의 궤도에 올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같은 디자인 전문가가 필요하겠죠. 다만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화됐다면 디자인보다는 비즈니스의 작동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알리콘은 독특한 조직 운영 방식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의 '아메바 경영'에 착안해 알리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메바 경영은 거대한 조직을 미생물처럼 작은 단위로 나눠 유연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말하죠. 분화된 조직 하나가 아주 작은 단일 사업체가 돼 일하는 겁니다. 저는 예전엔 공간플랫폼본부를 이끌었는데, 지금은 '공간셀'이라는 조직에서 일하고 있어요."
-공간셀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어떤 배경을 갖고 계신가요?
"무대 또는 전시 디자인을 했던 직원들, 그래픽 디자인이나 영상으로 브랜드 디자인을 했던 직원 등 5명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인테리어 시공 전체를 총괄하는 직원도 있어요. 다만 저희는 일반적인 인테리어 회사처럼 공간을 만드는 집단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디자인보다 '경험'에 집중해요.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에 퍼지는 향과 소리도 함께 개발하는 식이죠."
-최근 CDO로서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이었나요.
"원격근무가 활성화되면서 공유오피스나 스터디카페, 일반적인 카페 등 그야말로 '일할 곳'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장에서 집무실은 집무실만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공간 안에 숨겨져 있는 배려나 디테일에 감동하는 분들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저희가 이 일에 진심이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은 알아주더라구요. 집무실을 하나의 브랜드로 인정 받았다는 게 큰 성과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디자인적으로도 재무적으로도 균형 잡힌 공간 모델을 어떻게 만들까를 더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더 건강하게 확장할지 지속적으로 연구해야겠죠."
-앞으론 어떤 CDO가 되고 싶으신가요?
"정리정돈하면 사람들이 '정리의 아이콘'인 곤도 마리에를 떠올리잖아요.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든 경우죠. '일이 잘되는 공간' 하면 집무실을 떠올릴 수 있는 아이콘이 되고 싶습니다. 또 일본의 아티스트인 후지와라 히로시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도 꿈꿉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CEO들의 CEO'로 불리는 빌 캠벨처럼 동료를 존중하고 건설적이면서도 건강한 관계를 가지는 리더도 표방합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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