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진화하는 실손보험금 빼먹기 수법
실손보험은 가입자가 4000만명에 육박해 ‘제2의 국민건강보험’이라고 불리는 한편 높은 손해율로 인한 만성 적자 때문에 보험업계에서는 대표적인 ‘계륵(鷄肋)’상품으로 통한다.
다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백내장수술 청구건이 10분의 1이나 줄면서 최악의 상황은 벗어난 형국이지만 최근 영·유아 발달지연 치료 등 새로운 비급여 청구건이 급증하면서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A사의 경우 지난해에 영·유아 발달지연 치료비로만 약 91억원을 보상했는데 이는 2년 전(약 66억원) 대비 138%, 3년 전(38억원) 대비 311%나 증가한 것으로, 올해에도 1분기에만 27억원이 나가 지금 추세라면 올해는 약 120억원을 넘길 기세라고 하니 ‘백내장 포비아’(?)를 겪은 보험업계가 엄살을 떠는 것 같지는 않다.
2015년 이후 나타난 뚜렷한 출산율 감소세에도 발달지연 치료비가 증가한 것은 최근 TV, SNS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육아정보가 넘쳐나면서 전에는 무시했던 증상이 걱정돼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늘고, 일부 병원도 실손 청구를 염두에 두고 경증 치료에 적극 나서고 있는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발달지연[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상 R코드]’이란 영·유아가 출생 후 몇 년 동안 기본적인 신체적·지적·사회적 기술을 습득하는데 이때 본인 연령대에 어울리지 않는 발달지표가 나타나는 증상을 말한다. 문제는 진단이나 별다른 검사 없이 증상이나 징후로도 부여가 가능해 자칫 질병 진단이 남발될 우려가 있고, 치료센터 단독으로는 실손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병원의 진료·처방에 따라 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것처럼 꾸미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경기도 소재 OO병원은 별도의 치료센터를 세워놓고, 프리랜서 치료사가 혼자 모든 치료를 시행하고도 마치 병원 처방에 따른 것처럼 의무기록을 조작한 사실이 발각돼 사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경찰이 조사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치료사가 아예 병원을 차려 의사를 직접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이러한 ‘사무장 병원’은 수년 전에도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수사를 진행하는 등 이미 ‘사회악’으로 불릴 만큼 심각한 보험금 누수 주범으로 지목돼왔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발달지연 치료’라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낸 사무장 병원의 실손보험금 빼먹기 수법에 참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실손보험의 효시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에도 누적 적자가 커져 1980년 완전히 판매가 중단된 적이 있다. 그러다 1997년 제3보험 상품의 생·손보 겸영이 허용되면서 판매가 재개돼 오늘에 이르렀으니 나름 오랜 역사가 있는 좋은 상품이지만 ‘비급여 누수→손해율 악화→보험료 인상’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는 여전히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병원의 과잉 진료를 어떻게 모두 막겠느냐는 보험업계의 하소연에 수긍 못할 바도 아니나 상품 출시 당시 우선 팔고 보자는 영업논리에 밀려 누수 요인을 꼼꼼이 살피지 못한 책임은 외면한 채 실손보험료 현실화, 성과급 잔치 등 국민정서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도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보험업계도 신뢰회복을 위한 자성(自省)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비급여 누수로 인한 건보재정 악화 문제도 간과할 수 없으므로 관계당국도 민간 영역과 협력해야 할 사항은 없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할 것인데 최근 공사(公私)보험협의체 등을 통해 소통하는 모습은 이런 측면에서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향후 우리에게 다가올 고령화 시대에는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오래살 것인가가 중요하므로 어느새 공공재로 인식되는 실손보험이 제2의 국민건강보험, 나아가 국민건강지킴이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금융·보건당국, 보험업계, 의료업계가 상생의 지혜를 모아주기를 국민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기대해본다.
이후록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
p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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