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포크, 순결한 슬픔을 노래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지닌 남자였다. 애절했고, 섬세했고, 우울했다. 얼굴은 창백했고 사슴을 닮은 눈망울에서는 눈물방울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멜로디는 처연했고 노랫말은 애잔했다.
작은 체구에 통기타를 맨 채 미동 없이 지그시 눈을 감고 꿈을 꾸듯 노래하는 그를 보면 그가 노래요, 노래가 그였다. 그가 무대에 서면 매번 마지막 가창처럼 들렸다. 목숨과 바꾸려는 듯이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를 듣자면 비애와 허무와 고독의 심연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다. 고독과 허무는 그의 집이었다. “그리워 말아요/떠나갈 님인데/꽃잎은 시들어요/슬퍼하지 말아요”(‘하얀 나비’). 그는 진작 짧은 생을 예감했을까.
누구는 그의 가창이 청승맞고 노랫말은 부질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내세우거나 흉내내지 않았다. 슬픔의 영혼을 몸 안에 결박했다. 비애는 그에게 생래적이고 근원적인 것이었기에 순결하고 정갈했다.
그가 지은 노랫말들은 그 시절 다른 대중가요와 사뭇 달랐다. 사랑의 환희와 이별의 고통을 토해내지 않았다. 누구를 그리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아파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돌아서는 소녀(‘이름 모를 소녀’), 꿈속에서 나의 가슴 울리며 떠난 아름다운 그녀(‘사랑의 진실’), 헝클어진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걸어가는 여자(‘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그의 노랫말은 세월의 무상함과 삶의 신산함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다른 것들에 그저 투영했을 뿐이다. 그것들은 스며들 수는 있되 만질 수 없는 것들이다. 밤, 하늘, 구름, 바람, 안개, 길, 꿈 같은 것이다.
가사는 어둠 속에 빛나는 것들, 작고 소박한 것들을 노래했다. 유독 달과 별과 새와 꽃이 많다. 그리운 집을 찾아 헤매는 길 잃은 작은새(‘작은새’), 고요한 밤이 되면 나를 오라 반짝이는 별과 달(‘저 별과 달을’),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미소 짓는 달맞이꽃(‘달맞이꽃’), ‘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달빛 젖은 금빛 물결’(‘이름 모를 소녀’)….
김정호의 노래는 포크로 분류된다. 하지만 단순히 ‘포크’로만 묶어둘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는 본인 자체가 ‘장르’가 된 몇 안 되는 가수다. 가요 평론가들은 “미국 포크의 주류에서 벗어난 한국적 포크”라고 말한다.
포크는 1960대 후반 무교동의 세시봉과 트윈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로부터 문을 열기 시작했다. 통기타에 의지한 포크의 정서는 70년대 청년문화로 곧바로 뻗어나갔다. 그 코드는 꿈과 낭만, 해방과 자유, 방황과 반항이었다.
김정호의 1, 2집이 나온 1970년대 중반은 ‘별들의 고향’(1974년)과 ‘바보들의 행진’(1975년)이 시대정서를 강타한 때였다.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송창식의 ‘고래사냥’ ‘왜 불러’, 포크록의 개척자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물 좀 주소’, 신중현의 ‘미인’·‘아름다운 강산’, 그 몇 해 전으로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나왔다. 음유서정시인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은 조금 뒤인 1978년이고, 가왕 조용필의 시대는 1980년 ‘창밖의 여자’로 개막한다.
그 시절 포크는 가사와 멜로디가 슬픔과 고독을 노래하기보다는 도피적, 저항적인 게 많았다. 개인의 감수성보다는 사회적 메시지들로 해석됐다. 금지곡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김정호의 포크는 달랐다. 메시지가 없었다. 그저 존재의 내면을 노래했다. 소란한 바깥세상이 아니라 조용한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한(恨)이 서린 성문(聲紋)을 타고 태어난 그에게 내면으로의 침잠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는 그를 ‘한의 가객’이라 했다.
그의 목소리는 외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외할아버지는 월북해서 인민배우가 된 당대 최고의 소리꾼 박동실이었고, 어머니는 명창 박숙자다. 그도 말년에는 국악에 심취했다.
김정호의 1974년 데뷔 앨범과 그 이듬해 2집 앨범은 포크의 지형을 바꿀 만한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1집의 ‘이름 모를 소녀’와 2집의 ‘하얀 나비’에 열광했다. 1970년대 가요시장은 양분돼 있었다. 어른들은 트로트, 청년들은 포크였다. 김정호의 노래는 엘리트 대학생에게 쏠려있던 포크의 시장을 10대 청소년, 기성세대에까지 넓혔다.
그의 위대함은 모든 노래가 남의 작사·작곡에 기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롯이 혼자만의 작품이다. 천재 싱어송라이터였다. 그 점에서는 열세 살 아래인 가객 김광석과 또 다른 위치에 있다.
그는 ‘하얀 나비’로 큰 성공을 이루자마자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출연정지 처분을 받는다. 1979년 해금 조치가 내려졌지만 그는 무대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각혈을 하고 있었다. 폐병 걸린 가수였다. 인천의 요양원에 입원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개월 만에 뛰쳐나와 1983년 ‘님’과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실린 마지막 앨범 ‘라이프’를 내놓았다.
숨이 차서 한 소절을 녹음하고 휴식하고 다시 녹음을 하는 식으로 5개월이나 걸렸다. 그는 이즈음 꽹과리를 붙들고 ‘소리’에 심취했다. 피를 토하는 듯한 ‘님’은 그의 노래 중 가장 국악에 가깝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판소리를 듣고 자란 김정호 국악 포크의 정수다. 지금도 많은 후배가수들이 리메이크한다.
“간다 간다/나를 두고/정든님 떠나간다/님의 손목 꼭 붙들고/애원을 해도/님의 가슴 부여잡고 울어 울어도/뿌리치고/떠나가더라/속절도 없이/어쩌면 그렇게도/야속하게 가시나요”
그는 노랫말처럼 갔다. 1985년 11월 29일 평생 그를 지켜준 따스했던 아내 이영희와 여덟 살 쌍둥이딸 곁에서 눈을 감았다. 가수 활동 10년, 33년 8개월(1952~1985)의 짧은 생애였다. 그날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유언은 “앞이 보이는 넓적한 곳에 묻어달라”였다. 그의 생은 양지가 아닌 음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86년 한국 가요 사상 최초의 추모 앨범이 만들어졌다. 송창식, 윤형주, 김현식, 이정선, 윤시내, 김수희, 하남석 등이 헌정했다. 김현식은 김정호가 간 지 4년 후 같은 나이인 33세로 뒤를 따랐다. 김광석은 11년 후 31세로 요절했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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