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지수 “연기하고 있는 지금은 덤으로 사는 삶” [인터뷰]

2023. 4. 2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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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살다’ 테드 휴즈
여성서사극 속 나쁜 남자
공연 중 객석에선 비속어도
“사랑할 수 없던 캐릭터…
한 걸음 다가서 성장의 시간”
 
말 잘듣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
가족 생계 짊어지다 배우의 길
“연기하는 지금은 덤으로 사는 삶”
배우 문지수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공연을 이어온 두 달 동안 매일 한 문장씩 적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다고 한다. “소중하게 생각하자”, “이렇게 해도 아쉬울 테니, 소중한 마음을 갖자”, “끝까지 가봐야겠다”. 매일의 한 문장이 쌓이다 보니 ‘그날의 주문’이 됐다. 보물처럼 품은 마음은 각오로 새겨져 문지수의 연기를 겹겹이 채색했다. 한 겹 두 겹 덧대어질 때마다 그는 조금씩 깊어졌다.

대학로의 대표 여성서사극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문지수에게도 특별한 작품이다. 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그는 초연부터 함께 해온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의 삶에 전환점을 맞았다”고 했다.

실비아와 함께 날다…“모든 순간이 성장”

2014년 뮤지컬 ‘그리스’를 시작으로, 앙상블부터 조연까지 ‘맨 오브 라만차’, ‘맘마미아’ 등 대극장과 중소극장을 가리지 않고 무대에 섰던 그에게 재연 작품은 ‘실비아, 살다’가 처음이었다.

“전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저의 시간에 어떤 것을 하면서 보내는 지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이전에 했던 작품을 또 하는 것이 어떤 의미와 발전이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초연 이후 유달리 아쉬움이 컸어요.”

매 작품 ‘최선의 삶’을 살았지만, ‘실비아, 살다’는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배우는 하나의 인물과 마주하며, 그의 삶을 대신 살아낸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자신의 역할과 사랑에 빠지고, 연민을 느낀다. 문지수는 “항상 맡은 역할을 사랑했지만, 테드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돌아봤다.

제목 그대로, 미국의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주인공인 이 작품에서 그는 실비아의 남편인 테드 휴즈를 연기했다. 영미 문단의 스타이자 아내 실비아의 삶을 무너뜨린 주인공. 이 작품이 TV 드라마였다면 ‘국민 욕받이’가 됐을 캐릭터다.

“이해 불가의 나쁜 놈, 변명의 여지 없는 나쁜 놈이거든요. 공연 중엔 객석에서 욕이 들리더라고요.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정말 당황하기도 했고요. 커튼콜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죄송하다고 인사했어요. (웃음)”

천재 시인이면서 난봉꾼인 한 인물을 만나며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다. 사랑한다면서 바람을 피고, 헤어짐을 말하고, 또 다시 찾아오고, 버리는 남자. “그 모든 것에서 진심을 찾는 캐릭터”를 마주하며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난해 초연 막바지가 돼서야 내내 비워둔 이해의 간극이 메워졌다. 그 무렵 찾아온 이별의 감정이 빈틈을 채워줬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더 좋은 배우의 길”을 알게 됐다고 한다. 무대는 배우가 아닌, “관객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느낀 작품”이다.

“배우들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삼류는 나만 느끼고 관객은 못 느끼는 것, 이류는 나도 느끼고 관객도 느끼는 것, 일류는 나는 느끼지 못해도 관객은 느끼는 것이라고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 깊이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동안엔 제가 느끼지 못하면 연기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 표현이 달라지면 극도 달라지게 되더라고요. 이 좋은 작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추구하고 믿는 것이 아닌 ‘작품의 방향성’을 따라가며 관객을 우선순위에 두자, 배우로서 또 하나의 세상이 열렸다. “진짜에 가까운 가짜를 믿기 위해” 끊임없이 담금질을 하고, 버리고 비워냈다.

“실비아를 부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사랑에 미쳤다가, 열린 지식인의 얼굴을 하면서도 권위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치졸하고 찌질한 이면을 끌어낸다. “욕을 먹는 것이 즐겁고”, “맡은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생길” 만큼 충족감을 안긴 무대였다. “모든 순간이 성장이었어요.”

배우 문지수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늦게 찾은 꿈…마약처럼 삼킨 긍정의 힘

배우의 길은 문지수에겐 삶 자체였다. 학창시절엔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사이엔 학원과 도서관 뿐이었다. 꽤나 공부를 잘했다. 목표했던 대학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그것이 원하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며 휴학을 했고, 장남의 무게를 짊어지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군대에서 생각을 정리했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 댄스 동아리에 들어 점심, 저녁에 20분씩 연습했어요. 공부 이외에 유일하게 좋아한 일이었어요. 친구랑 밑도 끝도 없이 영화를 찍으러 다녔고요.”

어딘가 깊숙이 품고 있던 꿈과 기억이 비집고 나와 그를 뒤흔들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20대 초반엔 완전히 지표를 잃었다”고 했다. 삶은 버거운 짐이었다. 문지수를 둘러싼 세계는 불안과 불확실성으로 뒤엉켰다. 희생과 책임의 무게가 그를 조여왔던 때였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요. 제게 주어진 무게가 너무 무거워, 이렇게 살면 원망이 커질 것 같더라고요.”

다니던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 다시 수능을 치러 경희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졸업작품으로 찍은 ‘106동 102호’가 독립영화제에 출품하며 ‘2011년 데뷔’라는 타이틀도 안게 됐다. 뮤지컬 데뷔작은 2013년 ‘그리스’였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이 작품에 “수염을 기른 채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DJ 역할에 캐스팅됐다. 옥탑방에 살며 오디션과 알바와 공연을 오가던 그 시절 두려움은 없었다. 연기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20대 초반 불길하게 그를 감싸 안던 우울감으로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찾은 꿈이다.

“제게 연기는 삶과 죽음에 맞닿아 있어요. 연기를 시작한 그날부터 지난 10년은 덤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삶은 제게 덤이고 보너스예요.”

거창하고 거대한 꿈을 꾸지 않는다. 문지수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오래도록 연기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스타를 꿈꿀 수도 있는 때이지만 그는 “언제나 내가 노력해서 해낼 수 있는 수준의 일들이 조금씩 주어지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주어져 맡게 된다면, 그건 제 배우 생활을 깎아먹는 일일 거예요. 전 배우와 스태프가 인정하는 배우이고 싶어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낼 수 있는 것이 주어져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배우의 길’이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길을 걸으며 슬럼프도 있었다. 하지만 지친 날은 없다. 언젠가는 도달할 곳이라 생각해서다. 하루에 한 알씩 ‘긍정’이라는 마약을 삼키니, 그의 내면은 균열 없이 견고해졌다. 그래서 오늘도 흔들림 없이 첫발을 디딜 수 있다.

“목적지는 사라지지 않잖아요. 저는 그냥 거길 향해 걸어가면 되더라고요.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리 돌아가도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돌아가야만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더라고요.”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서도, 10년 뒤 계획을 미리 세워뒀다. 배우 생활을 하며, 어머니와 제주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것이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 “꿈을 말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공간”을 만들어, “긍정의 힘을 나누고 싶다”고 한다.

“‘실비아 살다’의 넘버 중 ‘어두운 계단을 걷다 보면, 환한 빛이 우리를 마주할 거야’라는 가사가 있어요. 이건 확신이 아니잖아요.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리 같이 걷자는 말이 제게도 힘이 됐어요. 저 역시 늘 그런 사람이고 싶었어요. 힘든 시기를 겪어왔기에 옆에서 응원하며 같이 걷는 사람,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주는 배우이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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