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제국에 맞선 동네 서점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나[박건형의 홀리테크]

박건형 테크부장 2023. 4. 27.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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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북샵.org, 동네 책방 2200곳을 살리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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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시애틀의 한 창고에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창업에 나선 청년이 있었습니다. 프린스턴대를 졸업하고 헤지펀드 D.E.쇼 앤 컴퍼니에서 일하던 이 사람은 인터넷이 언젠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분야는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인터넷 서점. 초기 경쟁자들이 많은 시장에서 그는 편집자와 작가를 뽑아 고객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주는 글을 쓰게 합니다. 고객들의 전화 대기 시간을 1분 이내로 줄이면서 ‘편의성’을 앞세운 이 서점은 순식간에 경쟁 업체들을 무너뜨리고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합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이 많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The world’s largest bookstore)’라는 별칭을 가진 인터넷 서점 ‘아마존(Amazon)’의 전신 ‘괴물 책방(Monster bookstore)’과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얘기입니다.

매일을 창업 첫날(Day 1)처럼 살라고 강조하는 베이조스는 인터넷 서점의 성공 이후에 유통·물류·식료품·디지털콘텐츠·미디어·의약품·우주개발까지 진출하는 분야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아마존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한때 세계 최고 부자가 되기도 했던 그와 아마존의 성공을 두고 아마존드(아마존에 의해 파괴되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베이조스와 아마존이 아닙니다. 거대한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남은 작은 책방들의 얘기입니다. 미국의 거대 유통 업체들조차 맞서지 못했던 아마존의 무차별적인 공습 속에 이들은 어떻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키워드는 ‘아이디어’와 ‘공존’입니다.

◇동네서점의 십자군이 된 남자

앤디 헌터 북샵.org 창업자 /북샵.org

이 성공 스토리의 시작에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앤디 헌터. 디즈니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비영리 출판사 일렉트릭 리터레이처의 창업자이자, 웹사이트 릿허브의 창립 파트너 겸 발행인. 이른바 출판업계 종사자입니다. 그는 2018년 미국서점협회의 한 이사와 만난 자리에서 동네 서점들이 아마존과 같은 대형 인터넷 서점으로 인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전해 듣습니다. 당시 서점협회는 블로거와 기자들이 책을 인용하거나 리뷰할 때 아마존 대신 다른 독립 서점의 사이트로 연결하는 링크를 제공하는 ‘인디바운드(IndieBound)’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은 대실패였습니다.

1998년부터 출판업계에서 일한 헌터는 며칠 뒤 인터넷 서점의 온라인 구매 물류를 간소화하고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서점을 통합하는 것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서점협회에 보냈습니다. 기술전문 매체 와이어드는 “협회는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거절했다”면서 “협회는 인디바운드가 잘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2년 뒤인 2020년 1월28일, 헌터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듬어 아예 직접 사업에 나섰습니다. 사이트 이름은 북샵.org(Bookshop.org). 헌터는 “소규모 서점들을 하나로 묶는 이커머스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고, 이런 서점들도 온라인에서 고객을 직접 찾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면서 “이들을 돕는 것은 마치 의로운 십자군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주변 사람은 물론 일부 언론조차 사업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아마존이 장악한 시장에서 뭘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서적시장 분석업체 북스탯에 따르면 아마존은 미국 전자책과 오디오북의 90% 이상, 인쇄물 판매의 42~4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020년 북샵.org 출범을 전하는 기사에서 “사람들은 아마존에 들어가면 책 뿐만 아니라 한 번에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것에 호의적이다”면서 “심지어 동네서점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조차 4분의 3 이상이 한 달에 평균 5회 이상 아마존을 이용한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보다 더 큰 격차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이라는 평가였습니다.

◇각자 꾸미는 인터넷 서점

북샵.org 홈페이지 /북샵.org

실제로 고작 5명으로 뉴욕 한켠에서 시작한 북샵.org의 초창기는 암울했습니다. 투자자들은 “가치 있는 일이다”라는 반응만 보였고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헌터만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언젠가 100만달러(약 13억원)를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헌터의 아이디어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북샵.org는 기본적으로 동네서점들이 입점하는 이커머스 사이트입니다. 얼핏 이베이나 아마존, 쿠팡의 제3자 입점 방식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북샵.org에는 동네서점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개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북샵.org에 입점한 서점은 자체적으로 개성 있는 서점을 꾸릴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픽션(SF) 전문점’, ‘아시아 역사 전문 서점’ ‘봄에 볼 만한 책 모아보기’ 같은 식입니다. 이른바 서점의 세계관을 반영한 서점 진열대를 꾸미는데 몇 분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구매를 위해 개별 서점 사이트로 연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인터넷서점과 마찬가지로 북샵.org의 장바구니에 추가되고 각기 다른 서점의 책을 한번에 결제하고 주문할 수도 있습니다.

헌터는 단순한 인터넷 홈페이지가 아니라 대규모 유통망도 구축했습니다. 동네서점들이 인터넷 판매를 하지 못하는 걸림돌은 자체 사이트 구축과 재고 관리, 배송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를 한번에 처리한 것이 헌터의 방식입니다. 북샵.org는 서적 도매업체 인그램(Ingram)과 제휴를 했습니다. 동네서점은 북샵.org에서 직접 판매하고 배송할 수도 있고, 재고 관리와 배송을 북샵.org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북샵.org 사이트에 입점한 동네서점에서 판매가 이뤄지면 그 주문을 그대로 북샵.org가 넘겨받아 나머지 절차를 대행해주는 겁니다. 동네서점이 북샵.org에서 책을 공급받는(실제로는 고객에게 바로 배송될 뿐 서점은 책을 갖고 있거나 보내지 않습니다) 가격은 표지 가격에서 30% 할인된 수준입니다. 동네서점 입장에서는 30%의 마진이 무조건 보장되는 겁니다. 북샵.org는 동네서점이 입점만 하면 세금 납부와 회계처리까지 대행해줍니다.

◇하루에 100만달러 책 판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북샵.org는 입점사들 가운데 판매와 배송을 일임하는 곳에는 정기적으로 북샵.org 전체 영업이익의 10%를 추가로 배분합니다. 마치 협동조합 같은 개념이죠. 와이어드와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개별 서점들 가운데는 수익 배분으로만 연간 수천만원을 버는 곳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신규 고객도 대거 등장했습니다. 북샵.org은 꼭 실제 동네서점이 있어야만 가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헌터와 북샵.org는 블로거, 작가, 인플루언서 등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모두 개인 자격으로 북샵.org에서 가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책 가격의 10% 할인 혜택을 제공합니다. 동네서점이 책을 판매할 수 있는 고객까지 끌어들인 것이죠.

헌터는 와이어드에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이 행운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얘기는 사실 좀 더 복잡합니다. 팬데믹 기간 봉쇄가 이어지고 사람들의 외출이 줄어들면서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빅테크에 대한 쏠림 현상이 오히려 심각해졌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동네 서점들의 매출은 쪼그라 들었고 수많은 곳이 문을 닫았습니다. 동네 서점들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북샵.org가 등장한 겁니다. 처음 창업 당시 200곳 정도였던 입점 업체는 가파르게 늘어났습니다. 2월에 5만달러였던 매출은 3월에는 하루 7만5000달러로 늘었고 4개월째가 되자 헌터의 목표인 100만달러의 매출을 돌파했습니다. 여름이 되자 하루 매출이 100만달러에 육박했습니다. 상상 이상의 바람몰이에 성공한 겁니다.

북샵.org은 각종 사회 이슈의 혜택도 톡톡히 봤습니다. 흑인의 목숨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이 2020년 재점화되자 흑인 소유의 입점 동네서점들을 전면에 내세웠고, 흑인 기업을 지원하려는 구매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시카고의 한 흑인 동네서점은 2020년에만 무려 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아마존에 불만이 많았던 작가와 유통업체, 출판사들도 북샵.org의 우군이 됐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고객들의 취향 변화도 북샵.org에는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개별 동네서점이 꾸미는 북샵.org는 거대 서점이 할 수 없는 다양한 큐레이팅이 가능합니다. 팬데믹 기간 여행서적 매출은 줄었지만 요리나 홈스쿨링 같은 카테고리의 책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서점은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겁니다.

◇아마존 대항할 ‘에브리씽 스토어’ 꿈꿔

아마존의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사업에 궤도에 오르자 북샵.org는 동네서점과 중소출판사를 위해 전자책 서비스도 시작했습니다. 북샵.org는 처음 시작 단계부터 철저히 아마존과의 연결고리를 끊었습니다. 아예 주주 계약에 “아마존을 비롯한 동종 10위 업체에는 회사를 매각할 수 없다”는 조건을 넣었습니다. 헌터가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막은 조항이지만, 헌터의 제안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북샵.org가 동네서점에 나눠준 수익셰어만 2500만달러가 넘습니다. 현재 북샵.org에 입점한 동네서점은 미국과 영국을 합쳐 2200곳에 이릅니다. 뉴욕타임스, 버즈피드, 복스, 더 뉴리퍼블릭 같은 대형 온·오프라인 미디어들도 북샵.org를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마존의 책 판매액은 연간 40억~50억달러에 이르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와이어드는 이에 대해 “북샵.org와 아마존을 비교하는 것은 사과와 오렌지가 아니라 사과나무 한 그루와 세계 최대 규모의 오렌지 과수원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북샵.org의 서적 매출은 아마존의 1% 수준입니다(동네서점을 모아 이만큼 만든 것도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헌터의 꿈은 훨씬 더 큽니다. 북샵.org로 성공을 거둔 헌터는 아마존이 없애버린 다른 영역으로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꿈꾸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철물점 같은 동네 상점과 장난감 가게입니다. 책을 공구나 장난감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아마존과 같은 ‘에브리씽 스토어(모든 것의 상점)’를 소규모 상점의 연합체만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헌터의 생각입니다.

뉴욕타임스는 “북샵.org가 또 다른 아마존이 될 것이라고 느끼는 동네서점들의 인식이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했습니다. 아마존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아마존의 편리함과 그로 인한 출판 시장의 성장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마존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고 시장 자체를 망가뜨렸습니다. 이미 큰 아픔을 경험한 동네서점들 입장에서는 북샵.org도 언제 돌변할 지 모르는 거대한 경쟁자일 뿐이라는 겁니다. 헌터가 결국 베이조스의 길을 가게 될까요. 결과가 어찌되든 아마존 제국에 사실상 맨손으로 대항해 균열을 낸 용감한 창업자의 얘기는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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