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발전 속도 못 따라가는 대학 교육과정..."우수 교수 확보 정부가 지원해야"
④실효성 있는 인재 양성 정책의 실마리
첨단산업 인재 육성 시동… 미스매치 '여전'
우수·고급 인재, 교수 부족… 풀어야 할 숙제들
편집자주
유보통합부터 대학개혁까지. 정부가 교육의 틀을 다시 짜겠다는 계획을 밝힌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한국일보는 교육계 전문가 13명에게 이번 정부 교육개혁 정책의 기대효과와 부작용, 위기와 기회 요인(SWOT)을 물었습니다. 공정한 출발선은 가능할지, 잠자는 교실은 일어날지, 대학을 위기에서 구해낼 방법은 무엇일지 5회에 걸쳐 분석합니다.
# 올해 2월 지방 A과학기술원 기계공학부를 졸업한 박호연(25·가명)씨는 대학 4년 동안 4대 역학인 동역학, 재료역학, 열역학, 유체역학 이론을 배웠다. 그러나 드론, 항법개발, 지능형로봇, 자율주행 등 세분화된 현업 분야 실무를 공부하긴 쉽지 않았다. 박씨는 "전체를 아우르는 기초 이론을 학부생 때 배우고 대학원에 가야 수소차, 드론 등 세부 분야 연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실무를 배울 기회도 부족했다. 그는 "학점이 주어지는 인턴 프로그램이 없어 실무를 배우려면 휴학하거나 방학 중 기업의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데, 휴학이 부담스러워 포기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 서울 4년제 B대학교 컴퓨터과학전공 4학년에 재학 중인 박모(23)씨는 다른 학교 전공자들이 모여 있는 스터디에서 블록체인을 공부하고 있다. 서버를 구현하는 등 실습을 주로 하는데, B대학에 관련 수업이 개설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들이다. 요즘 기업들은 아마존의 서버구축프로그램 AWS(Amazon Web Services)를 많이 사용하는데, 정작 학교에서 배우는 건 2000년 전후에 많이 쓰인 HTML이다. 박씨는 "수업에 사용되는 책에도 신기술은 없고, 전공자 대부분 외부활동, 팀 프로젝트 등을 통해 필요한 내용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제 역할 못하는 첨단산업 교육… 정부, 인재 육성 사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산업 구조는 빠르게 변화하는데 대학의 정규교육 과정은 옛 산업 구조에 맞춰져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청년들은 취업난에 신음하고, 기업들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반도체, 미래차 등 신산업 분야에서 필요한 인력을 채우지 못하는 '일자리 미스매치'가 심각한 상황이다.
이에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의장인 인재양성전략회의를 출범시켰다. 2000~2008년 국가인적자원위원회 이후 15년 만에 교육부 중심의 인재양성 컨트롤타워가 생긴 것인데, 그동안 각 부처별로 사업이 추진돼 비슷한 정책이 중복 시행되는 등 비효율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미래 먹거리' 첨단 산업을 키우기 위해 미래 핵심인재 양성을 주요 교육개혁 과제로 제시했다. 특히 △항공·우주, 미래모빌리티 △바이오헬스 △첨단부품·소재 △디지털 △환경·에너지 5가지 핵심분야를 선정해 산업별 인재양성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2031년까지 반도체 관련 인재 15만 명을 육성할 계획이다. AI와 소프트웨어, 빅데이터 등을 포괄하는 디지털 분야에서는 2026년까지 100만 명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또 바이오헬스 산업을 반도체에 이은 차기 주력사업으로 키우기 위해 2027년까지 핵심인재 11만 명 양성을 추진한다. 환경·에너지 분야는 올해 상반기에, 항공·우주 분야와 첨단부품 분야는 하반기에 인재양성 규모와 방안이 마련될 예정이다.
그러나 지금도 빈틈이 많은 대학 교육과 산업 현장의 수요, 정부 정책 간의 미스매치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재양성을 통한 첨단 산업 경쟁력 확보는 효과를 거두기 힘들 거란 우려가 나온다.
인재양성 정책 기대감… "산업 발전 발판 마련"
한국일보 교육개혁 자문단의 전문가들은 대학이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인재를 양성하게 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부 주도로 대학이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첨단산업이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상아탑에 머물던 대학이 산업 요구에 부응하는 인재양성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유도하고 지원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평가했고, 김민희 대구대 교직부 교수는 "이번 정책은 미래사회 변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해 첨단기술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산업계도 환영했다. 손지호 한국바이오협회 산업지원본부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 정책에서 인력양성은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내용으로 다뤄졌다"며 "최근 인재양성 정책을 별도로 발표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인재양성 정책에 따른 성과를 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정책 내용으로만 봤을 땐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정책-산업계 미스매치 여전… 실무·우수 인재 늘려야
그러나 여전히 대학의 교육 수준이 산업계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 어려울 거란 우려가 크다. 실무·실습·세부 분야 교육 부족, 현실과 뒤떨어진 교육 내용 등을 단시간에 바꾸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지금의 학부는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 교양인을 키워내는 수준"이라며 "기업의 눈높이와 학생의 실력 사이에 수준 차이가 있고, 곧바로 학생들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수준의 인력이 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전공자를 채용해도 실무에서 본인 역량을 발휘하기까지는 추가 교육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반도체 아카데미처럼 실무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다양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우수·고급인재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첨단산업은 기술력을 유지하기 위해 석·박사급 인력이 필요하고 이들의 연구 역량도 높아야 하는데, 현재 정책은 가까운 미래에 충원할 수 있는 인력 양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또 우수대학에 인재양성이 집중될 경우 지역 균형과 지방대 반발 등에 부딪혀 정책이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미래모빌리티업계 관계자는 "기업에선 석·박사 인력이 필요한데, 지원자들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며 "학사급 인재도 필요하지만, 단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부트 캠프 이수자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채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이 공장을 수도권 밖에서 운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인재 수준 때문"이라며 "인재 풀이 늘어나는 것도 시급하지만, 질적인 수준도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계에서는 융합인재와 다양한 전공자에 대한 수요가 많지만, 인재양성이 특정 학과에만 집중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연구, 임상시험, 허가 업무 등 업무 영역이 다양한데, 실험 인력 위주의 정책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바이오학과나 생명공학과 등의 연구인력뿐만 아니라 의대, 약대, 간호대 등 유관학과 인재를 다양하게 양성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6일 발표한 바이오헬스 산업 인재양성 대책에는 의사과학자 양성 방안만 담겨 있을 뿐 약대나 간호대 등 유관전공자 양성 방안은 담기지 않았다.
가르칠 교수는 어쩌나… "정부 채용 지원 필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수진 확충은 풀어야 할 숙제다. 지금도 대학에서 각 분야 전문지식을 갖춘 교수를 채용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육과정이나 교수진이 첨단 산업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A과학기술원 졸업생 박씨는 "모교에서도 급성장하는 첨단 분야 젊은 교수를 초빙하려고 했으나 결국 무산됐다"며 "AI나 자율주행 등 신산업 분야는 교수들도 관련 경력이 부족해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며 배울 정도"라고 말했다.
정부는 기업 종사자를 교수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선하고 임용·초빙 자격요건을 완화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교원 확충이나 인건비 지원과 관련된 구체적인 청사진은 없었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특정 전공을 전국적으로 확대할 경우 대학별로 교수 충원 등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며 교수진 확충이 정책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 평가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도 "대학에서 교수를 채용하기 쉽지 않아 정부에서 교수 채용을 지원해 줘야 한다"며 "특정 분야 전공 외에 연계학과 교수도 많이 채용돼야 융합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첨단 산업 분야 전문가들은 대학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유치 경쟁을 벌이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취약한 대학들은 고액 연봉으로 교수를 스카우트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교수진 채용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산업계 수요를 최대한 충족하기 위해 현장 의견을 청취하고 있고, 교원 증원도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교수 인건비의 직접 지원은 없지만, 대학혁신지원사업이나 첨단분야 혁신융합대학사업 등 각종 사업 지원금의 일부를 인건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해 대학들이 교원 확충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게 교육부 설명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기업 규모별, 지역별로 원하는 인재상이 다를 수 있어 현장 의견을 토대로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유관부처에 (국립대의) 교원 증원 요구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육개혁 자문단(가나다 순)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 김민희 대구대 교수, 김병주 영남대 교수, 민세진 동국대 교수,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반상진 전북대 교수,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 송기창 숙명여대 교수, 이범 교육평론가, 임희성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 정제영 이화여대 교수, 조상식 동국대 교수
※글 싣는 순서
①공정한 출발선은 가능한가
②잠자는 교실 깨우려면 필요한 것들
③위기의 대학, 재도약의 필수조건
④실효성 있는 인재 양성 정책의 실마리
⑤교육계 뒤흔들 남은 쟁점들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김종훈 인턴기자 usuallys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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