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열대 우림 속 선인장’의 최후

기자 2023. 4. 2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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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크린 세이버가 돌아가는 컴퓨터처럼 살고 있다. 전원이 완전히 꺼지지 않고 풀타임으로 가동 중인 뇌는 잠을 잘 때에도 충분히 쉬지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침대에 가지고 들어가는 스마트폰이다. “잠깐만 놀자”며 스마트폰을 깨우면 한두 시간은 ‘순삭’이다. 각종 SNS, 쇼핑 앱,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전전하다 지쳐 눈을 감을 땐 뇌는 이미 활성화된 상태다. 여기서부턴 난잡한 꿈의 문이 열린다. 대낮에 맑은 정신으로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꽤 낯설고 아득하다. 명멸하는 액정, 익숙하게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 취할 만한 정보를 찾아 빠르게 움직이는 눈, 톡하고 손끝으로 화면을 찍으면 바로 펼쳐지는 자극의 세계. 내 의지로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버튼만 누르면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반자동 기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이 흔한 도시의 밤, 나는 밤의 노동을 시작한다. 빅테크 플랫폼에서 나는 각종 데이터를 생산하고 또 소비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에 기반해 뜨는 맞춤형 광고를 따라 클릭에 클릭을 이어가며 계획에 없던 물건들을 구매한다. 하루 이틀 후면 언제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잡동사니가 문 앞에 배달되어 있을 것이다. 용케 구매를 피한 상품들은 장바구니에 담긴 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신경을 자극한다.

<호모 아딕투스>는 이런 경제 시스템을 ‘중독경제’라 규정했다. 20세기 초엔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돈을 버는 제품경제였다면, 20세기 중반이 되면 필요가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는 관심경제가 열린다. 유래 없는 풍요와 함께 생산이 수요를 초과하고, 광고를 통해 주목을 끌면서 없던 욕망도 만들어내는 물건만이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비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 시스템도 곧 한계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21세기 들어 자본은 24시간 소비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각종 디지털 기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은 두 가지 방법을 취했다. 더 큰 자극으로 어떻게든 주목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고 소비자의 시간과 관심을 최대치로 확장해서, 그렇게 늘어난 대부분을 생산과 소비가 구분되지 않는 디지털 라이프에 투여하게 하는 것.

이를 위해 중독이 디자인된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해 기이할 정도로 많이 생산되는 상품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소비하게 만드는 일. 이건 인간의 의지를 유혹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약물이나 알코올뿐 아니라 음식, 게임, 운동, OTT 등 많은 시장이 중독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보상과 쾌락에 관여하고 중독을 일으키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에 주목이 쏠리고 있다. 인간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이 ‘필요’도 ‘욕망’도 아닌, ‘도파민’이 되어 버린 시대. 사회의 복잡성과 인간 내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점점 무가치해지고 있다.

문제는 인간이 쾌락을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환경에서 진화해왔다는 점이다. 두세 시간씩 헤매고 다녀야 겨우 먹을 걸 찾을 수 있었던 인간에게 도파민은 그 고난을 견딜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는 생명의 물질이었다. 하지만 고개만 돌리면 단 20초 안에 도파민 분비가 자극되도록 설계된 시대는 사람을 무기력한 반자동 기계로 만든다. 중독에 대해 다룬 책 <도파민네이션>은 도파민 과잉 상태에 놓인 인간이 “열대우림 속 선인장”과 같다고 설명한다. 도파민 과습에 노출된 인간은 자신만 썩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까지 말라죽이고 있다. 이 중독의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각종 디지털 기기에 접속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말이야 말로 참 쉽고, 가장 중독적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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