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멋진 신세계? 차라리 ‘1984′더라
몇십년 전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래는 예측했던 시점보다 빨리, 그리고 정교하게 도래하기에 놀랍고도 불쾌하다. ‘불쾌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내가 실현된 미래를 ‘멋진 신세계’라기보다 ‘1984′적이라고 느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이렇게 똑똑히 자각하게 된 순간이 있다. 2016년 런던에서였다. 막스 앤드 스펜서 슈퍼마켓에서 음료수와 간식을 계산하려는데 계산대가 없었다. 사람들은 지금으로 따지자면 키오스크에서 바코드를 찍어서 직접 물건을 계산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없었고, ‘삑삑’ 하는 기계음만 들렸다. 곧 사람들이 기계로 대체되는 건가 싶었다.
하루아침에 기계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졌다. 주차장의 수납원, 주유소의 주유원이 사라지고 무인 정산과 셀프 주유의 시대가 왔다. 무인 주점과 무인 판매점, 무인 카페가 생겼고,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키오스크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동네의 막국수집은 테이블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면 로봇이 서빙해준다. 로봇이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는 카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또 상상이 현실이 되는구나 싶었다. 이건 ‘카페 알파’의 세상이 아닌가.
로봇이 커피를 내려주는 만화가 있다. 제목이 ‘카페 알파’다. 1994년부터 고단샤의 잡지에 연재된 아시나노 히토시의 이 만화는, 한국에서는 1997년에 단행본으로 발매되었다. 만화에서는 알파라는 로봇이 커피를 내려준다. 한국에도 소소한 마니아층이 있는 이 만화를 나는 읽다가 말았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이 만화, 그리고 이 로봇, 너무 인간적이다. 인간인 나보다 훨씬 수줍음이 많고 인간인 나보다 인간을 좋아한다. 소위 말하는 ‘휴머니즘’이라는 것까지 탑재되어 있다.
역시 사람은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로봇인 주제에 나보다 우월한 인간적인 감수성의 소유자인 알파를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술은 못 마시지만 술자리를 좋아하고, 풍경 사진도 찍고, 새해 해돋이를 보러 가고, 불꽃놀이에 감명받는다. 유머도 있다. 동네 할아버지가 “자넨 로봇이라며? 좋겠군, 튼튼해서”라고 하면 “후훗, 그럼 바꿀까요?”라는 대화를 구사하니까. 알파에게 눈물샘이란 눈을 적시기 위한 용도일 뿐이라고 하지만 왜 그런지 알파는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월금을 켜면서 중국의 옛노래를 부를 때, 눈물이 난다. 이게 알파다.
나는 알파가 인간적이라서 좋아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이지 않은 로봇이나 AI가 좋은 것은 아니다. 무인점포나 키오스크 형태로 주변에 있는 그것들을 보면서 느끼고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둔탁하고 부자연스럽다. 특히나 키오스크는 대체로 직관적이지 않아 불편하다. 하나의 키오스크 사용법을 익혔다고 해도 다른 점포에 가면 새롭게 다시 익혀야 한다. 뒤에 사람이 서 있으면 위축되어 더 안 된다.
키오스크를 작동시키다가 나는 인간의 존재를 깨닫곤 한다. 에러가 나거나 사용에 애를 먹으면 어딘가 있던 관리자가 달려온다. 키오스크로 술을 사려고 하면 경보음이 울리고 또 관리자가 달려온다. 술을 사려는 사람이 성인임을 확인한 관리자가 승인을 해줘야 술을 살 수 있다. 술을 사려다가 관리자가 승인을 안 해줘서 걸린 청소년들도 보았다. 편의점과 달리 키오스크에서 술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관리자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언젠가 구매자의 나이를 인식하는 키오스크가 나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제는 고전이 된, 1995년에 나오고 국내에 이듬해 소개된 니컬러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원제는 ‘Being Digital’)’라는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터페이스에 대한 나의 꿈은 사람 같은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너무 낭만적이고 공허하며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판받기 쉽다.” 이 책의 부제가 ‘정보초고속도로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안내서’라는 것도 말하고 싶다. 이 발상이 낭만적이고 공허하거나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파가 인간적이라서 나는 알파가 불편했는데, 시간이 더 흐르면 알파 같은 인간다운 로봇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날이 올까? 미래는 예측했던 시점보다 빨리, 그리고 정교하게 도래하니 그런 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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