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버킷 리스트 지우기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케니언 대학교 졸업식 축사는 우화로 시작된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아?’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말없이 헤엄쳐 가다가 결국 물고기 한 마리가 옆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이것은 물이다>, 나무생각, 2012)
누군가 내게 “실패해서 속상하지 않아?”라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대체 실패란 게 뭐야?” 내가 실패를 모르는 것은 실패한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한 내 삶의 디폴트이기 때문이다. 내가 야심차게 시작한 모든 일은 실패로 끝났다. 한때는 내게도 버킷 리스트가 있었다. ‘2년마다 한 권씩(출판사에서 의뢰받은 게 아니라) 번역하고 싶은 책을 번역해 직접 출간하기’ ‘번역하는 데 필요한 외국어 학습하기’ ‘번역가들끼리 모여 번역 학술대회 개최하기’ ‘호수공원에서 내 번역서 낭독하기’….
2년 전 프랑스 소설가 외젠 쉬의 <파리의 미스터리>를 번역해 웹소설 플랫폼에 연재했다. 최초의 신문 연재소설 중 하나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영감을 준 중요한 작품이다. ‘조만간 출판사에서 거액의 선인세를 들고 달려들겠지’라고 기대하며 5개월에 걸쳐 주말마다 한 챕터씩 번역을 해서 올렸는데,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조회수가 100건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21회를 마지막으로 소리 소문 없이 중단하고 말았다. 이따금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책을 중역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원어를 공부하려고 학습서를 구입한다. 하지만 막상 번역을 시작하면 영어 문장 해독하기도 벅차 원서는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채 원고를 마감하기 일쑤다. 그렇게 내 책꽂이에는 <알기 쉬운 노르웨이어 입문> <The 바른 헝가리어 첫걸음> <Beginner’s Icelandic with 2 Audio CDs>가 먼지 쌓인 채 꽂혀 있다.
지난해 학구적인 번역가 몇명과 번역실험실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로 했다. 영어 번역가 두 명과 프랑스어 번역가 두 명으로 드림팀을 꾸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전체 모임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다섯 달이 흘렀다. 우리가 겪은 시행착오와 비법을 후배들에게 전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친목이라도 다지면 좋겠다는 소박한-간절한-바람으로 축소됐다. 지천명의 나이에 배운 유일한 삶의 지혜는 버킷 리스트를 지우는 법이다. 네모 칸에 체크 표시를 해서 지우는 건 하수다. 상수는 가로줄을 쳐서 지운다.
버킷 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은 체크 표시로 지울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몇년째 고양버스커즈에 소속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소음 민원 때문에 기존 버스커도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새소리를 배경으로 책의 한 대목을 낭독하고서 며칠 뒤에 문자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고양문화재단 지역문화팀입니다. 먼저, 고양버스커즈 재오디션에 응해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현장 오디션 결과 최종 불합격되셨음을 안내드립니다.” 도대체 실패란 게 뭐야?
노승영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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