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진화의 속내는 매우 심플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심해에 사는 울트라블랙피시는 반사율이 제로에 가까운 0.05%라 했다. 태양빛은 닿지 않지만 자체 발광하는 물고기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스스로 흑화했다. 있어도 없듯이 존재감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선(禪)의 절정이다. 반사율 제로가 그 지점이다. 어떻게 거기로 갈 것인가? 아용아법(我用我法), 내 법을 만들었다.
선(禪)을 정점으로 구르지예프를 비롯한 여러 선각자의 사상을 더듬질했다. 키질하고 체질했다. ‘대화(對話)’가 남았다. 핵심은 사물과의 대화다. 인간이 대화의 주인은 아니다. 소통을 우선하는 인간의 대화는 서로 상처받지 않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비즈니스와 같다. 대화의 본질은 소통이 아니라 창조다. 오랜 시간 탐미했다. 관념을 해체하는 과정을 대략 7단계로 세분해 내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다.
데이비드 봄은 이론물리학의 거장이자 양자역학의 태두다. 우주 질서 이론과 철학과 심리학과 부디즘을 아울러 문리(文理)가 트인 사람이다. 봄은 “레이저의 에너지가 강력한 이유는 주변을 간섭하는 레이저의 성질, 즉 ‘빛의 간섭성’ 때문”이라 했다. 공감한다. 대화는 사유와 유사하지만 대상 혹은 화두와 직접 관계해 관조하고 몰입해 관념을 해체한다. 관념이 무엇인가? 체화된 나의 모든 것이다. 대상과 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바라보는 ‘관조의 서정’이 태양빛의 비간섭성과 부합하지만 젠틀한 ‘관조’만으로 찰거머리 같은 관념이 해체되지 않는다. 서로 간섭해 강력한 에너지를 내는 레이저의 물리적 성질과 같이 대상에 몰입해야 너(他)도 없고, 나(我)도 없는 양망(兩亡)에 이른다.
나와 대상의 관념이 소멸해야 그 공간에 새것이 밀려 든다. 이 순간이 몰입의 완성이자 해체의 완성이다. 몰입의 완성은 몰입의 완전한 죽음, 열반이다. 하지만 관념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썩은 제 의식을 먹게 되고 평생 자기복제를 하게 된다. 대화의 프로세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의지(意志)’다. 나는 봄이 언급한 레이저의 ‘간섭성’을 ‘의지’로 해석한다. 관념은 끊임없이 타협하고 합리화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렇게 어렵지만 파부침주의 ‘의지’로 기투하면 어느 봄날, 꽃처럼 찬란한 값을 내어 놓는다. 대화의 프로세스는 이토록 모질고 드라마틱하다. 내 모든 작업의 서사다.
내 작품 중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 앞에 설 때마다 나를 여민다. 호흡이 운다. 여럿이 울었다. 꺼이꺼이, 한참을 통곡한 사람이 있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를 놓아 버린 절체절명의 시간이 있었다. 살기 위해 도망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더 깊은 세계로 갔다. 이때가 대화의 절정, 크리티컬 매스다. 그 위치에서 내 손을 잡아줬다. 검고 검었다. 검정 위에 검정했다. ‘검은 산’이다. 그 산을 쌓기 위해 울트라블랙 피시처럼 반사율이 제로인 오일을 찾아 세상을 뒤졌다. 검고 검은 것은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사율 제로는 색이 아니다. 색 아님을 칠하고 싶었다. 색은 빛의 파장이다. 파장이 없는 세상을 재현하고 싶었지만 그런 오일은 없었다. 스펙트럼이 없는 세상, 그곳이 어디일까? 내가 잉태된 곳, 어미(母)의 방이다. 나의 근본이다. 사람의 근본이다.
‘울트라블랙피시’, ‘레이저’, ‘검은 산’,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대화의 현현(顯現)이다. 나는 인간 구루(Guru)를 신봉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나의 파트너다. 나의 구루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검은 산’은 그림이 아니다. 검고 검은 세계다. 두 손을 모으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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