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지평 너머] 전세금 9000만원 vs 연봉 1억원
“엄마, 2만원만 보내주세요.” 지난 14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세사기 피해자 20대 청년이 그 며칠 전 어머니에게 전화해 이 말을 꺼낼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교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야 하는 날벼락에 밤이고 낮이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수도요금 6만원을 내지 못해 나붙은 단수 예고장은 힘겨웠던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지난 두 달 사이 20~30대 전세사기 피해자 3명이 빈곤과 절망 속에서 삶을 등졌다. 이들의 전세보증금은 7000만~9000만원이다. 누구는 이 중 얼마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누구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할 사정이었다.
다른 한쪽에서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평균 연봉 1억원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액 100대 상장사(금융업 제외) 중 평균 연봉이 1억원을 넘긴 이른바 ‘1억 클럽’에 들어간 기업은 35개로 전년(23개)보다 12개가 늘었다. 2019년(9개)에 비하면 4배 가까이 급증했다. 하나·KB국민·신한·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도 지난해 모두 처음으로 1억 클럽에 가입했다. 대기업 계열 비상장사나 알짜 중견기업, 은행 외 금융사들까지 찾으면 1억 클럽 멤버들은 훨씬 더 많다. 어딘가에는 전세사기로 날아간 수천만원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1년에 이들의 전세금보다 많은 급여를 받는 직장인들이 있는 곳, 바로 지금 대한민국이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불평등이 확대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생산량이 많아질수록 사유화할 수 있는 재화도 늘어난다. 불평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불평등은 약 1만년 전 인류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과 목축 사회로 전환되면서 본격화돼 고대 국가와 중세 봉건시대, 근대 세계로 이어져 왔다. 극심한 불평등에 끝내 폭발한 민란, 반란, 혁명이 수도 없이 일어나 천지가 혼란에 빠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나라가 전복돼 온 것이 인류의 역사다.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오래전부터 국가가 나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채무자와 보증인들을 빚에서 해방시키는 왕의 명령이 주기적으로 내려졌다. 중국에서는 북위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귀족들의 대토지 점유를 막기 위해 백성들에게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균전제가 실시됐다. 나라에 세금을 내고 노역과 병역을 제공할 백성들을 보호·유지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이 원리는 지금의 시장경제 체제에도 유효하다. 성장과 발전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초래하는 불평등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불만을 폭발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가 역할을 해야 한다. 바로 복지 국가다. 복지를 통해 불평등의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은 시장경제를 더욱 역동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현대사회에서 불평등을 좌지우지하는 요소로 조세와 재정, 노동시장, 기업규제, 교육 등을 꼽는다. 세금이 낮아질수록, 정부의 재정지출이 줄어들수록, 노동조합의 교섭력과 기업규제가 약화될수록, 교육격차가 심해질수록 불평등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서 불평등이 가장 완화됐던 시절은 전쟁 동원으로 인해 세율이 치솟고(소득세 최고세율이 94%까지 올라갔다), 정부의 지출과 규제가 늘고, 노조의 힘이 강력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다. 이들 요소 모두 정치, 정부 정책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로 양면성을 갖고 있다.
세금 인하는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를 증대시킬 수 있지만 부자들에게 혜택이 집중되고 정부 재원이 줄어들게 한다. 재정 지출 축소는 재정건전성은 높이지만 복지 지출을 축소시킬 수 있다. 노조 활동 억제는 임금 부담을 줄여 기업의 수익을 높일 수 있지만 노동자들의 소득을 떨어뜨려 소비를 위축시킬 수 있다. 규제 완화는 기업 활동을 지원해 경제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기업의 과도한 이윤과 소비자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민주주의 정부라면 양방향의 장단점을 잘 저울질해야 한다. 하지만 현 정부의 정책은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다. 세금과 재정 지출은 줄이고 규제는 풀면서 노조를 압박한다. 모두 불평등을 확대할 개연성이 높은 방향이다.
가난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괴한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센딜 멀레이너선 교수는 실증 연구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돈 걱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상태보다 더 심각한 인지능력 상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난은 인간의 자기절제 능력을 감소시켜 더욱 충동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빈소 앞 조화에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적혔다. 그 가난과 불평등을 막지 못한 국가에,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jk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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