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생명의 장엄함을 보며 떠올린, ‘변이’의 힘
진화론을 ‘유전적 변이의 차별적 선택’으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변이를 가져 부모와 다른 자식 중 일부는 성공적으로 생존하여 같은 변이를 가진 손자손녀들을 만들어낸다. 살아남은 개체만 다음 세대의 후손을 남기니 무척 당연한 얘기다. 유전되지 않는 변이는 진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변이’ 앞 ‘유전적’도 중요하다. 다윈 진화론의 얼개를 이해하고 나면 이처럼 자명한 진실이 발견될 때까지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진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려면 변이는 필수다. 변이가 전혀 없어 똑같은 후손들만이 태어나는 생물종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멸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변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물종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하지만 변이의 확률이 너무 커도 문제다. 우연적 변이 대부분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낳아도 어차피 생존하기 어려운 자손을 소중한 생물학적 자원을 동원해 과도하게 만들어내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유전적 변이의 확률이 너무 작으면 멸종으로 이어지고, 확률이 너무 크면 낭비가 발생한다. 변이는 진화의 분명한 원인이자 자명한 결과다.
자식 하나의 크기가 아주 작아서 별 어려움 없이 수많은 자식세대 개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종은 높은 변이 확률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1000마리 자식 가운데 딱 10마리만 생존을 해도, 후손들도 같은 방식으로 대를 이어가면 몇 세대만 지나도 엄청난 숫자가 된다. 높은 변이 확률은 고위험 분산투자를 닮았다. 대부분의 투자는 쫄딱 망해 아무런 수익이 없지만, 극히 일부의 투자가 성공을 하면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나와 다른 유전형을 가진 자손을 변이로 만들어내고 이 중 성공적인 변이를 가진 자손이 대를 이어가는 진화의 메커니즘 자체도 이처럼 진화가 만들어낸 것이다. 진화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으니, 진화가 진화를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우주에 우리 아닌 다른 생명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오리, 아니 오광년(光年)무중이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곳에서는 진화의 메커니즘이 자연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리학은 우주적 규모의 자연법칙의 보편성을, 생물학은 우주적 규모의 진화의 보편성을 말한다. 우주 어디서나 같은 빛의 속도와 생명의 진화를 스스로 발견해낸 우리 인류는 드디어 우주적 규모의 물리학 학회와 생물학 학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었다고나 할까.
자연에서 진화를 배운 인간은 이를 과학에 이용하기도 한다. 유전 알고리즘이라고 불리는 재밌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에서 ‘유전 알고리즘 그네타기’로 검색해 볼 수 있는 동영상이 있다. 마구잡이로 움직여 그네를 잘 타지 못하는 개체들로 0세대 집단을 구성하고, 조금이라도 더 잘 타는 개체들만으로 다음 세대를 생성한다. 자식 세대의 개체를 생성할 때, 유성 생식하는 현실 생명처럼 유전자의 변이와 조합도 허락한다. 이러한 유전 알고리즘을 따라 여러 세대가 이어지면, 그네를 몹시 잘 타는 개체들이 자연스럽게 출현하게 된다. 어떻게 그네를 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고리즘으로 구현된 진화의 힘만으로 그네를 잘 타는 인공 개체들이 결국 생성된다. 진화는 놀라운 시계를 만들어내는 인간 시계 장인을 닮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눈이 멀어 엉뚱한 조합으로 수없이 많은, 작동하지 못하는 시계를 만들어내지만, 엄청나게 긴 시간이 허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화는 엄청나게 긴 시간을 수명으로 가진 눈먼 시계공이다.
동양 고전 <대학>에 은나라 탕왕이 매일 스스로 다짐했던 글귀가 나온다. 바로,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다. 하루하루 새롭게 하는 것을 재귀적으로 다시 반복하는 것은 모든 생명이 계속 이어가는 진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진화가 만들어낸 온갖 생명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보며 변이의 힘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숨 가쁘게 달려갔던 선조들의 후예다.
4월 중순에 피어 꽃말이 ‘중간고사’라고 농담했던 벚꽃은 올해는 3월 말에 피었다. 때 이른 개화를 보며 환경의 변화를 절감한다. 환경이 변하면 우리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기나긴 세월 우리 인간을 만들어낸 진화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바꾸지 않으면서 생존의 헛된 꿈을 꾼 생명은 없다. 삶의 방식의 변화는 미래의 여전한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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