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몰래 집주인 바뀔 땐 계약 해지’ 판례 있지만 기준 미비
‘상당한 기간’ 기준·방법 모호…전세사기 막도록 관련 법·제도 보완 필요
서울 관악구의 한 빌라에 거주하고 있는 A씨(34)는 며칠 전 자신도 ‘깡통전세’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기부등본을 새로 떼서 보고 반년 전에 자신도 모르게 집주인이 바뀐 사실을 안 것이다. 그는 전 집주인에게 수십차례 전화와 문자를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공인중개소를 통해 새 집주인과 연락된 A씨는 “계약 갱신을 하지 않겠다. 9월 계약 만료 때 나가겠다”고 통보했다. 돌아온 답은 그러나 “나도 요즘 힘들다. 돌려줄 돈이 없으니 계속 살든지 법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모임을 통해 내용증명을 보내는 법을 알아보고 있다.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마련해 구제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현실에서 악용되는 임대차계약의 허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임차인이 계약 체결 시점에 임대인(집주인)의 세금 체납 사실이나 선순위 보증금 존재 여부 등을 모두 확인했더라도 이후 집주인이 바뀌면 전세사기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임대인이 집을 매도할 때 임차인에게 매도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전세사기’의 시발점인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왕’ 사건의 경우 건축주가 임차인과 임대차계약을 맺은 뒤 자력(경제력)이 없는 김모씨(지난해 사망)로 집주인을 변경했다.
시세가 불분명한 신축빌라로 임차인들에게 집값보다 높은 보증금을 받고 임대차계약을 맺은 뒤 바지사장으로 임대인 명의를 바꿔버리는 전형적인 전세사기 수법이다. 임차인들은 계약 만료 시점에서야 집주인이 바뀌었고,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는 무자력자(경제력이 없는 사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행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임대인은 임차인의 동의 없이 자신의 집을 타인에게 팔아넘길 수 있다. 임차인에게 집을 매도한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도 없다.
주택임대차보호법(제3조 4항)은 임차주택 양수인이 집을 넘겨받을 때 기존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것으로 봐서 임차인이 기존 임대인과 맺은 계약 내용을 모두 보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전세사기로 악용될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대법원은 1998년 9월 ‘경매개시이의신청기각’ 재항고 사건에서 임차인이 새로 변경된 소유자와 임대차계약 승계를 원치 않는다면 임차주택의 양도 사실을 안 때로부터 상당 기간 내에 이의를 제기해 임대차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기존 임대인에게 보증금 반환 청구를 할 수 있다고 결정한 바 있지만 대부분의 임차인들은 이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홍정환 법무법인 루트 대표변호사는 “만약 현재 바뀐 집주인이 무자력을 이유로 보증금 반환을 거부할 경우 임대차계약 해지와 함께 기존 임대인에게 보증금 반환 청구를 하는 방법도 강구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집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안 날로부터 ‘상당한 기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임대차계약을 맺고 계약갱신일 전까지 기존 집주인과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임차인의 경우 2년 가까이 집주인 변경 사실을 모를 수 있는데 이때도 ‘상당한 기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을 통해 임대인이 주택 양도 시 임차인에게 주택 양도 사실, 양도인이 파악하고 있는 양수인의 자력 정보 사실, 임차인이 일정 기간 내에 이의를 제기하고 해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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