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언니들, 그런데 휠체어를 타는
[숨&결]
[숨&결] 유지민 | 서울 문정고 1학년
우리는 처음 가는 식당은 인터넷 후기를 살피고, 여행 계획을 짤 땐 다녀왔던 사람들의 추천을 받는다. 이렇듯 새로운 시도엔 누군가의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면 말이다. 색다른 경험을 하고 예상치 못한 추억을 쌓거나 배움을 얻을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를 받게 될 가능성이 더 많다.
한국에서 ‘장애 여성 청소년’으로 살아간다는 건 가이드 없는 모험을 매일 하는 것과 같다. 불확실성과 불안함의 늪에서 허우적대느라 쉽게 지친다. 선택에 따른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도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주변의 비장애인 지인들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니 그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다. 항상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드는 까닭은 나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연대와 유대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래서 늘 ‘휠체어 타는 언니들’을 간절히 원해왔다. 부모님도 답해줄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에 함께 답을 궁리해줄 이들이 필요하다. 종종 만나는 언니들에게 듣는 ‘나도 해냈으니까 지민이 너도 충분히 해낼 수 있어!’라는 말은 내게 단순한 응원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굳이 무언가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으며, 일상, 몸, 미래, 삶의 목표 같은 것들에 관해 더 자주 이야기 나누고 싶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면 ‘한번 만나는 일’이 무척 어렵다. 수도권에서조차 두 대 이상 휠체어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나 카페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최근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이 개정돼 장애인 편의시설 의무설치 기준이 좀 더 작은 동네 식당이나 카페 등으로 확대됐지만, 그 대상은 신축, 증축, 개축, 재축되는 곳으로 한정된다. 법이 바뀌어도 실제로 체감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이렇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만나는 소위 ‘번개모임’은 꿈도 꿀 수 없고, 최소 2주 전부터 단 하루의 만남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 우리가 모일 수 있게 ‘판’을 깔아주길 바라왔다.
협동조합 무의에서 연 ‘걸즈 온 휠즈―나다운 프로젝트 만들기’ 토크콘서트는 이런 내 갈증을 풀어준 행사였다. 지난 16일, 서울 성수동 한 공간에 30대 넘는 휠체어가 모였다. 이 가운데 여성이 20명 이상이었다. 한 공간에 그렇게 많은 휠체어가 들어찬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행사는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장애 여성 3명, 유튜버 ‘굴러라 구르님’ 김지우, ‘리즌정’ 이유정, 가구 디자이너 김예솔의 강연으로 시작해 연사들과 질의응답, 휠체어 꾸미기, 경품 추첨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이어졌다.
‘멋진 언니들, 그런데 휠체어를 타는’이라는 이번 행사의 부제처럼, 굳이 장애를 앞에 내세우지 않고도 매력적인 여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기뻤다. 휠체어 가방 제작자, 일러스트레이터, 회계사, 개발자…. 마음 같아선 한명씩 붙잡고 친하게 지내자며 오지랖을 부리고 싶었다. 언제나 ‘휠체어 타는 걔’로 수식되던 우리가 개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장애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관련한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오고 가는 이야기에서 때로는 공감하고, 분노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행사 마지막에는 이 자리에 함께한 모두가 마치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된 것 같은 강력한 연대감을 느꼈다.
행사에 참석했던 한 아이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아, 여기 봐, 다 휠체어 타는 사람이야! 휠체어 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 여기 오길 잘했지? 너의 세상이야!” 장애 여성, 특히 젊은 장애 여성들은 많은 장소에서 너무 소외되거나 도드라지기 십상이다. 이번 행사가 장애 여성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다운 프로젝트를 꾸려볼 영감을 줬다면, 앞으로는 장애 여성들 커뮤니티가 많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됐으면 한다. ‘나다운 새로운 일’을 도모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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