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아, 너의 ‘존버’를 응원해!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김은형 2023. 4. 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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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한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정숙아, 언니야. 너 76이니까 말 놓을게. 아니, 그냥 친구 먹자. 우리 같은 엑스(X)세대 아니겠니? 너네 76들은 72는 엑스세대 아니라고 선 그으려고 하더라. 완경 레이스도 이제 같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마당에 그냥 친구라고 생각할게.

며칠 전에 네가 한 말, 친구들 사이에서 난리 났어. 월드컵 한일전에서 골 넣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니까. 남편 무슨 일 하냐는 말에 니가 “죽었어요”라고 말했을 때 말이야. 건너편에 있던 네 남편이 마시던 술을 분수처럼 내뿜었잖아.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 그때 맥주 마시며 보다가 같이 뿜었다는 애들이 한두명이 아니야. 드라마 보다가 십년 묵은 체기 뻥 뚫어지는 핵사이다, 진짜 오랜만이라고.

주변에 너처럼 참고 사는 애들 한두명이 아니었잖아. 대학 과 커플로 결혼한 미영이, 걔 시집 내려갈 때마다 당신 아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공부 잘했는지, 그런 남편 만난 미영이가 얼마나 운 좋은지 시아버지한테 이십년째 귀에 피딱지 앉게 듣는 거 알지? 미영이는 심지어 장학생이었는데 말야. 지혜는 몇년 전에 시집 식구들이 가족여행에 빠지면 안 된다고 성화해서 친정엄마 수술할 때 병원도 못갔던 거 기억해? 돈 있는 시어머니가 애들 학원비 대주는 거 두번이나 이야기하면서 가자고 했다잖아. 그런 일 있을 때마다 슬쩍 링 밖으로 내려와서 팔짱 끼고 딴 데 보는 남편, 갖다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었겠어?

네가 말했지. “우아하고 완벽했던 나의 아름다운 가족, 그들에게 난 무엇이었을까?” 뭐긴 뭐겠어. 확인사살은 안할게. 그런데 말야 ‘우아하고 완벽한 가족’이란 어떤 걸까. 먼지 한톨 없이 예쁘게 꾸며진 집에 의사 남편과 의사 아들, 모범생 딸? 써놓고 보니 부럽긴 하다. 하지만 배 아파서 하는 이야기는 아냐. 따져봐봐. 이십년 넘게 뼈 빠지게 쓸고 닦고 했어도 공동명의는 꿈도 못꾸는 집? 아침마다 반찬 투정에 짜증내는 딸내미? 너 무시하는 병원 레지던트 선배와 연애하는 아들? 주차 좀 편하게 하자고 간이식 받은 너한테 장애인 등록하라고 닦달하고 물건 살 때는 최저가 검색해서 온라인 주문하라고 잔소리하면서 불륜 여친한테는 오백만원짜리 팔찌 사주는 네 남편? 이 중에 뭐가 우아하고 뭐가 완벽하지?

니네 집이 잘못됐다는 게 아냐. 개발에 땀 나게 맞벌이하며 대출이자에 허덕이는 미영이네나 칠십평 고급빌라 사는 전업주부 지혜네라고 다르겠니. 우리 집구석은, 응, 그냥 생략할게. 일찍이 미드 <위기의 주부들>이 설파했잖아. 모든 집에는 밖에 내놓을 수 없는 각자의 쓰레기통이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난 네가 안됐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너도 인정하잖아. 대학병원 교수 사모님, 청담동 며느리라는 타이틀에 어깨 으쓱하며 그게 완벽한 인생인 줄 알면서 살아왔다고. 사실 타이틀에 목숨 거는 대한민국에서 그 정도 속물성이야 전국민 기본장착 수준이니 너한테 뭐라고 할 것도 아니지.

그래도 네가 죽다 살아나면서 인생의 현타를 느끼게 돼 기뻐. 한 집안의 호구로 백살을 살다가 숨넘어가는 순간 현타가 오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스러운 일이지 뭐야. 인간이 나이 들며 성숙해진다는 건 네게 온 것과 같은 현타를 경험하는 거 아니겠어? 타이틀, 남들 시선,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 이런 거 다 부질없다는 깨달음 말야.

오십살은 모든 것이 결정된 나이라고들 생각하잖아. 오십을 코앞에 두고 “다른 미래를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너 정말 존경스러워. 요즘 너뿐만도 아냐. 너랑 동갑인 황도희(<퀸메이커>)는 잘나가던 회사 때려치우고 그 험한 정치 선거판에 뛰어들었더라. 너만큼이나 부잣집 사모님 코스프레에 지루해 하던 이화(<종이달>)는 은행 인턴으로 ‘경단녀’ 재취업을 하더니 젊은 남자랑 아주 그냥 난리 났어. 미디어 속 ‘완벽한 나의 가족’ 신화가 점점 깨지고 있는 거지.

같이 바쁜 아들한테 자꾸 캐묻고 고3인 딸한테 신경 못쓴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 말은 신경도 쓰지 마. 혼자 사는 노후에 관한 글을 많이 쓴 일본 작가 우에노 치즈코는 자식에게 짐되는 걸 두려워하는 부모들을 향해 “감당할 수 있는 부담이라면 가족에게 도움받는 게 벌 받을 일은 아니”라고 했어. 친족법에 한 가족 호구담당은 엄마라고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아들뿐 아니라 동료들한테도 많이 물어보고 필요할 때는 도움도 부탁해. 안 그래도 못마땅한 늙은 아줌마가 민폐 끼친다고 트집 잡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래 봤자 욕이 배 뚫고 들어오는 거 아니잖아? 참, 너 근데 예고편 보니까 그만두겠다고 그러는 거 같더라. 정신 차려, 이것아. 너 이십년 삼십년 일한 친구들은 막 보람 넘치고 자아실현 만랩하고 그럴 거 같지? 그냥 ‘존버’야. 정숙아 인생은 ‘존버’야. 너의 존버와 인생 턴어라운드를 응원해!

문화부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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