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백정도 사람이다", 예비 검사가 소환한 형평운동
"내가 누군지 아냐"여경 폭행한 예비검사 100년전 진주서 외친 백정 평등운동 조명 '조선 형평사' 창립… 차별에 맞서 싸워 현재도 소외·차별 여전, 인권 개선 필요
검사 선발 전형에 합격해 임용을 앞둔 32세 여성 '예비 검사'가 여경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어느 라인이냐"라며 폭언을 쏟아냈다고 한다. 예비 검사의 머리 속에 "나는 검사야, 너희들이 감히 나한테…"라는 생각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릇된 특권의식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차별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100년 전 '형평(衡平)운동'이 문득 떠오른다.
1923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 '진주(晉州)에 형평사(衡平社) 창립'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경남 진주에 사는 강상호(姜相鎬), 신현수(申鉉壽), 천석구(千錫九) 등 세 명은 그 고을에 있는 백정(白丁)의 부락을 방문하였더니, 그 촌민들은 여러 가지로 남에게 모욕받는 것을 호소하며 '우리들은 어쨌든지 사랑하는 자손에게까지 백정이란 천대(賤待)를 받게 할 수 없다'하며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는 지라. 이에 70여명 되는 진주 백정들은 일치단결하여 모처에 모여 가지고 여러 가지로 토의한 결과, 형평사라는 것을 조직하고 지난 25일에 발기총회를 열고 (중략) 다시 전국에 있는 40만 동족들에게 서로 단결할 것을 재촉하여 오는 13일에 진주좌(晉州座)에서 성대한 형평사 출생 축하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동한 '조선 형평사'다. 형평사는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만들자는 단체(社)를 뜻한다. 천한 계급으로 인식되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 등 천민층은 법적으로 해방됐다. 하지만 차별은 여전했다.
이렇게 조직된 형평사는 구체적인 세칙(細則)을 정해 활동하게 된다. "그 세칙은 전문이 10조나 되는데, 그중에 제3조에는 계급 타파와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며 서로 친목할 일 등이 기록되었더라."(1923년 5월 15일자 매일신보)
이후 형평사는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형평사는 백정인 당사자 뿐 아니라 가족, 특히 그 부인들을 모아 형평사 부인회도 조직하게 된다. 1923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진주 형평사 회원의 부인 100여명을 지난 10일 오후 3시에 형평사로 불러 모으고 '장차 앞으로 나아가며 인류(人類)에 벗어나지 않고 마땅히 행할 일을 해 나가면 여자 된 직분을 굳게 지키고 가정을 개혁하며 앞으로 자녀의 전정(前程)을 위하는 가정의 교육을 힘써야 하겠으며, 첫째가 형평 운동을 위하여 각자의 몸을 돌보며 한 가지 노력을 할 것이라'고 일장의 주의(注意)가 있었던바, 100여명의 부녀들은 정신을 깨는 듯이 흐느낌의 눈물을 흘린 자도 있고 한편으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더라."
계급 차별에 대한 불평이 꼭 백정에만 한한 것은 아니었다. 1923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반상의 구별로 보통학교 동맹휴학'이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전남 무안군 삼향(三鄕)공립보통학교에서는 지난 16일부터 돌연히 그 학교 생도 250명 중에 140여명이 일제히 동맹휴학을 하였다는데, (중략) 고래(古來)의 관습을 참작하여 학적부 신분란에다가 양반이면 양반이라고, 상민이면 상민이라고 기재하며 비밀리 취급하던 것이 상민 생도의 눈에 발견되어 그 부형들은 크게 분개하여 학부형 대회를 열고 협의한 결과,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오늘에 이렇게 불공평한 학교가 어디 있느냐 하고 야단을 칠 때 그 면 주재소 경관은 이 급보를 듣고 현장에 이르러 해산을 시켰는데, 이로 말미암아 생도는 위와 같이 휴학을 한 것이라더라."
이러한 형평사의 운동이 모든 계층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1923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 이래로 일반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물론(物論)이 분분한 중, 대개 신진 청년 사회는 그 요구가 정당하다 하여 그 해방을 원조하는 편이 많으며 대우의 개선을 실행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나, 그 외 구(舊) 습관에 젖은 완고 계급은 그것을 반대하고 또 그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타매(唾罵)하며 완고한 노동 계급에서는 그의 반대 운동을 하려는 기분이 많은 모양이라는데, 심지어 기생 사회에까지도 그것을 반대하여 그 축하식에서 여흥으로 청구한 기생이 한 명도 가지 아니하였다 함은 기보(旣報)와 같다."
이어 백정 중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양민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장지필(張志弼)이 형평사 운동을 주도하면서 한 말이 소개된다. "내가 29세 적에 동경에 가서 명치(明治)대학 법과 3년까지 다니다가 가정 형편으로 졸업하지 못하고 돌아와서 집에 있을 때에, 총독부에 취직하려고 경성에 가서 주선하였는데 민적 등본을 제출하라기에 그 등본을 올려다 본 즉 직업을 '도한(屠漢)'이라고 썼습니다. (중략) 도한이라는 것을 보면 곧 쫓아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자손손이 귀먹고 벙어리 되라는 일이 아닙니까. 이것이 누구의 죄악이라 할는지요. (중략) 우리의 목적은 다만 해방되어 평등한 대우만 받게 되면 그만이외다. 그 이상 더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백정들의 목적은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형평사는 서울로 본거지를 옮겨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조직이 확대되면서 노선에 대한 갈등이 불거져 분열됐다. 이후 활동이 침체되었고 1937년 일제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100년 전과 비교해보면 지금 우리는 엄청나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소외와 차별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백정'이란 모욕적 칭호와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예비 검사의 말이 겹쳐 들리는 것은 나 혼자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사마천(司馬遷)이 말했다. "탐욕보다 더 참혹한 화근이 없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없다." 이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그런 일들이 그만 일어나기를 제발 바랄 뿐이다.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너무 야하네"…청바지 내린 속옷차림 여성 광고판 `발칵`
- 장경태 "화동 볼에 입 맞춘 尹…미국선 성적 학대로 신고"
- "차라리 다 벗고 나오라"…이탈리아 홍보영상 `대망신`
- "평양 보여줄게" 핑크색 北유튜버…김치 담그며 "파오차이"
- ‘책방지기’ 文 “지역 발전 기여할 것”…장예찬 돌직구 “김제동·조국 나오겠죠”
- 韓 "여야의정 제안 뒤집고 가상자산 뜬금 과세… 민주당 관성적 반대냐"
- [트럼프 2기 시동] 트럼프, 김정은과 협상할까… "트럼프 일방적 양보 안 할 것"
- 내년 세계성장률 3.2→3.0%… `트럼피즘` 美 0.4%p 상승
- `범현대 3세` 정기선 수석부회장, HD현대 방향성 주도한다
- "AI전환과 글로벌경쟁 가속… 힘 합쳐 도약 이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