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32. 망우리 풍수산책(1)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묫자리(동구릉)를 정하고 이곳에 올라와서 바라보며 “이제야 근심을 잊겠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망우리(忘憂里).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해발 282m 망우산에는 근·현대를 수 놓은 인물들이 모셔져 있다.
1933년 망우리 공동묘지로 묘를 쓰기 시작하여 1973년 만장(滿場)으로 폐장했다.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2013년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에는 망우리 인문학길 사이길의 2개 코스가 조성되면서 근현대 역사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망우산은 동구릉의 끝자락에 자리한다. 1933년 일제가 망우산을 공동묘지로 지정한 것은 조선왕조의 맥을 끊기 위한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지표에서 2m도 안되는 깊이의 땅을 파고 묘를 쓴다고 맥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산책로를 따라 가면서 눈길 닿는 묘소들을 돌아봤다. 2회에 걸쳐 소개하겠습니다.
묘원관리소에서 조금 올라가면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사진과 간기(簡記)가 적혀있다.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 1902~1951) 묘소.
경기도 연천 출생. 춘천공립보통학교(현 춘천초등학교)를 거쳐 1917년 경성고보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하여 제적당했다. 다시 보성고보에 들어가 1921년에 졸업하고 일본 릿교대학(立敎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1928년 이화여전의 교수를 지낸다. 교수 재직 시 서정시 “무상”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동아일보를 통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강원도지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곧 사임하고 다시 이화여대 교수로 복귀했다. 1946~1949년 보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이대 교수와 학무위원장을 지냈다. 9·28 서울 수복 후 공보처 고문과 국영 코리아 타임스의 사장을 지냈다. 1951년 부산으로 피난 중 김활란(金活蘭)의 집에서 파티 중에 먹은 음식이 식중독을 일으켜 사망했다.
1951년 6월에 돌아갔으나 이듬 해인 1952년 이곳으로 모셨다.
그는 부친이 한의사를 했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앞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멈추어 10회절 명당을 맺은 자리에 묘소를 모셨다.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1855~ 1935)과 장남 지성주 묘소.
조선시대 천연두는 치사율이 30%를 넘는 무서운 불치병이었다. 지석영은 《종두귀감》을 보고서 감명을 받았고, 1879년 10월 부산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두 달 간 우두법을 배웠다. 그해 겨울 충주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를 시술하였다. 1880년에는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가지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96년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경성 의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통감부에서 의학교를 폐지하고 1908년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할 때 학감이 되었으나 한일합방(1910년) 후에 사직했다.
지석영의 부친 지익용(池翼龍)도 한의학에 정통하였으나 양반이라 개업은 하지 않았다. 장남 지성주는 1919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개업하였는데, 장안의 명의로 유명했다. 손자 지홍창은 서울의대 박사로 군의관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바있다. 증손주 지무영은 카톡릭 의대를 나와 개업을 하였으니, 5대째 의사 가문을 이은 셈이다.
멀리 동쪽 방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아들 지성주 묘소에서 11회절 명당을 맺고, 지석영 묘소는 여기(餘氣)에 자리한 10회절 명당이다. 후손들이 명망을 얻고 가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곳의 풍수적 뒷심도 적지아니 작동했을 것이란 판단이다.
지석영 묘소 입구를 지나 수백여 미터를 올라가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오고 바로 그 옆에 오긍선의 연보비가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면 입구의 기둥에는 해주오씨영역(海州吳氏塋域)이라 쓰여 있다. 그 왼쪽의 비석에는 “감찰오인묵적선비(監察吳仁黙積善碑)”가 서있다.
대원군 시절 전라도에 3년 흉년이 들자 오인묵은 공주에서 쌀을 싣고 금강을 따라 내려가 기민(饑民)을 구휼한다. 주민들이 그의 송덕비를 새겼는데, 생전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여 논에 묻었다가 오인묵 사후에 이곳으로 옮겨와 세웠다.
묘소는 1. 오인묵 부부 2. 오긍선 부부 3. 아들 부부 4. 손자 며느리 정희라리(鄭喜羅利, Hillary) 순서로 안치되어있다. 봉분 모양도 특이하고 오석(烏石)으로 조성한 것이 희귀하다.
해관(海觀) 오긍선(吳兢善,1878 ~ 1963)은 공주의 명문 양반가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문학을 공부한다. 1902년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07년 센트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며 의사면허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에는 목포진료소장 군산예수병원장 영흥학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3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수가 되었다. 1916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피부비뇨를 전공하고 귀국하여 세브란스에 피부과 교실을 신설했다. 1934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세브란스의전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 옹호,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총독부와 마찰을 빚다가 1942년 교장직을 사임한다.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은 사회부장관을 제의했으나 거절하고 평생을 사회사업에 전념한다.
아들 오한영(吳漢泳,1898 ~ 1952)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내과학을 전공했다. 또 1934년 일본 교토대학원에서 의학박사를 받고, 세브란스 내과 교수직을 담당했다. 6.25 전쟁으로 부산 피난시절 보건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과로로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한 오한영의 장남 오중근(吳重根, 1923 ~ 1983)은 마산결핵병원장을 역임 중 순직했다. 별세 후 정부의 청백리상을 수상하였다. 고양시 새문안동산에 모셨으나, 개발로 이장했다고 한다. 차남 오장근(吳長根, 1927 ~ 2009)은 철도병원장, 국립서울병원장을 지냈다.
묘역 뒤쪽에서 내려온 맥로가 오인묵 묘소에 11회절 명당, 오긍선 묘소는 10회절, 그 앞에 있는 아들 묘소는 9회절 명당을 맺었다. 즉, 묘역 전체가 명당판에 자리하고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의료에 종사했던 오긍선 가문의 후손들은 지금도 여전히 여러 방면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 묘소.
방정환은 아동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에는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당시에도 『어린이』는 10만권이 팔릴 정도로 소파는 출판과 기획의 귀재였다. 어린이들에게 공모한 시(詩)를 잡지에 실었으니, 서덕출의 “눈꽃송이”, 윤석중의 “앞으로”,“고추먹고 맴맴”, 이원수(15세)의 “고향의 봄”, 최순애의 “오빠생각”, 강소천의 “태극기”,“스승의 은혜”, “금강산” 등은 지금도 귀에 익은 동요이다.
소파는 돌아가는 순간에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별세 후에 홍제동 납골당에 안치했다가 1936년 망우리로 모셔왔다. 묘소는 봉분이 아니라 돌무덤이다. 비석 앞면의 동심여선(童心如仙)은 위창이 쓰셨다.
망우리 묘소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소파의 묘소.
애석하지만 맥로가 멈춰서 자리를 만들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곳에 모셨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 ~ 1939) 묘소.
1905년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공부하고 1908년 귀국하여 대성학교,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최남선의 광문회와 안창호 등의 신민회에 참여했다. 1911년 정치학 연구를 위해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 김성수,장덕수 등과 교유하고 1912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규식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동제사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12일에는 보신각에서 독립청원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주도하다 옥고를 치뤘다. 1927년에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중동, 배재, 중앙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1933년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이 되면서부터 언론을 통하여 역사서술로 민중 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조선심”, “조선학”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한국학의 계보는 이규태 등으로 이어졌다. 큰아들 문동표는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1947년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나 월북했다. 한문으로 된 옛 비석은 정인보가 짓고 서예가 김승렬이 썼다.
하단에서 위로 올라가는 1번의 맥로는 호암의 묘소를 지나가니 흉지에 해당한다. 중간의 청색선은 길흉의 경계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2번의 맥로는 위창의 묘소로 진입한다. 두 묘소의 거리는 불과 10여 미터이지만 맥로의 흐름은 전혀 다르다. 이를 판독하지 못하여 흉지에 모셨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 묘소. 문일평 묘소 오른쪽.
역관 오경석(吳慶錫)의 아들로 태어난 위창은 1880년 17세에 역관시험에 합격하여 대를 이어 역관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스승인 유대치와 연루되어 수난을 겪었고 1886년에는 박문국 주사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의 기자를 지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에서는 군국기무처 낭청(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정3품에 올라 우정국 통신국장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7년 34세 때엔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1년간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귀국 후에는 개화파로서 활동하다 1902년 6월 개화당 사건 때 일본으로 망명하여 5년을 보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3년간의 옥고를 치뤘다.
위창은 예술방면에도 조예가 깊었으니 그의 전서(篆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탁월한 안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옛 그림과 글씨 수천 점을 집대성해 <근역화휘(槿域畵彙)>, <근역서휘(槿域書彙)>, <근묵(槿墨)>,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을 편찬했고,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불후의 고전을 남겼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육당 최남선이 쓰고 위창이 감수하였다.
선언문 중의 “아(我) 생존권이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라는 구절에 이르자 위창은 육당에게 박탈은 ‘빼앗아 가는 것’이고 ‘빼앗겨 잃어버린’ 피동태는 박상(剝喪)이라고 교정을 하고서는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서 큰 일”이라고 하셨다. (출처; 유홍준의 안목)
묘역 뒤에서 내로온 맥로가 위창 묘소에 정확하게 10회절 명당을 맺는다.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당신의 풍수해설에는 좌청룡 우백호를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필자는 좌청룡, 우백호로 표현되는 전통풍수는 박물관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풍수의 이론은 복잡 다단한데, 게다가 현장에서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풍수에서는 지기를 감지할 줄 아는 것, 즉 기감(氣感)이 가장 중요하니, 기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기감만 된다면 풍수의 그토록 난해한 이론들도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필자가 맥로이론에 의한 맥로도를 표시하는 것은 현장에서 당처(혈처)의 풍수파워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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