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렉스 매장엔 공기만 판다고요? 당신에게 안판겁니다

김기정 전문기자(kijungkim@mk.co.kr) 2023. 4. 2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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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가 베테랑들이 본 '한국 명품시장'

최근 한국로렉스가 지난해 실적을 발표했다. 이 회사는 명품 시계 '롤렉스'의 국내 판매법인이다. 2022년 매출은 2994억원, 영업이익은 328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19.5%, 13.9% 상승했다. 하지만 롤렉스 매장을 찾는 고객들은 여전히 "시계 재고가 없다"는 말을 듣기 일쑤다. 팔 물건도 없는데 한국로렉스는 어떻게 장사를 한 것일까. 국내 유통업계의 베테랑 명품 담당자들로부터 럭셔리 시장의 구조적 특성을 들어봤다. 다만 명품업계는 언론에 특정 브랜드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로 불리는 명품시장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취재원의 신분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불황 속 역대급 실적

한국로렉스를 비롯해 해외 명품업체들은 지난해 '경기 불황' 속에서도 역대급 '매출'을 올렸다. 이달 해외명품업체들이 일제히 금융감독원에 감사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에루샤'라 불리는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만으로도 지난해 국내 매출액은 4조원에 육박한다. 3개사의 영업이익도 1조원을 넘어섰다. 특히 샤넬은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각각 30%, 65%나 늘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는 한국의 명품 시장 규모가 지난해 21조1080억원으로 20조원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모건스탠리도 지난해 한국인 1인당 명품 소비액이 325달러로 미국(280달러), 중국(55달러) 등을 앞지르며 전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과는 '희소성'을 특징으로 하는 명품의 독특한 브랜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부'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한국 소비자의 특성이 '핵융합'을 이룬 결과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롤렉스 인기 모델 사려면

"롤렉스 매장엔 공기밖에 안 판다? 당신에게 안 파는 겁니다."

유통업계의 명품 담당자들은 "코로나19 초기를 제외하곤 물건은 계속 들어왔다"고 말했다. 한국로렉스의 매출이 줄지 않은 이유다. 올해 들어 열기가 살짝 식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롤렉스 매장이 여전히 전시용 제품 외에는 물건을 꺼내놓지 않고 있다. 서브마리너나 데이토나 같은 인기 롤렉스 모델은 구경하기도 쉽지 않다. 1000만원대 서브마리너가 당장 구매가 가능한 리셀(재판매) 시장에서 2000만원대에 거래되는 이유다.

롤렉스는 한국에 매장 10곳을 두고 있다. 직영이 아니라 매장마다 소유주가 달라 영업방식도 모두 다르다. 따라서 업장 매니저의 재량이 크다고 한다. 하지만 '실적'에 대한 압박 때문에 비인기 모델을 구매한 고객에게 인기 모델이 돌아갈 확률도 높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유통업계 명품담당 A씨는 "인기 모델이 들어오면 모든 고객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바로 리셀 가치가 2배 이상 붙기 때문이다. 구매 이력이 쌓이고 프로필 관리가 된 손님에게 우선권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고 에르메스 더 비싼 이유

에르메스 인기제품인 버킨백 또는 켈리백의 가격은 1500만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중고명품숍에서 이들 백을 사려면 수천만 원의 프리미엄(웃돈)을 줘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셀 가격이 높아졌다기보다는 이들 백의 유통구조 때문에 에르메스 매장에서 파는 신제품보다 중고숍의 제품이 더 비싸게 됐다.

에르메스코리아는 전 매장을 직영으로 운영한다. 에르메스 본사는 전 세계 점장들에게 연간 특정 수량의 버킨백과 켈리백을 나눠준다. 지난해 10개를 팔았으면 올해 11개를 주는 식이다.

즉 한정된 수량의 백을 본사가 조절하며 판매하기에 신제품을 받으려면 웨이팅 리스트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고 때로는 1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래서 구매력이 있고 바로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은 비싼 웃돈을 주고 중고명품숍에서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명품업계에서는 통상 버킨백이나 켈리백을 손에 넣기 위해 소비자가 에르메스 국내 매장에서 써야 하는 돈을 1억원 이상으로 본다. 에르메스의 각종 액세서리와 스카프, 그릇 등을 꾸준히 구매하며 에르메스의 충성고객이 돼야 한다. 예를 들면 화제가 됐던 5만7000원짜리 에르메스 기름종이 같은 것이다. 그제야 에르메스 점장은 마치 어제 새로 상품이 들어온 것처럼 버킨백이나 켈리백을 내놓을 것이다. 고객별로 또 국가별로 버킨과 켈리를 알현할 수 있는 '실적 금액'은 차이가 있다.

'오늘이 제일 싸다'는 샤테크

명품의 또 다른 특징은 '오늘이 제일 싸다'는 신화를 유지하는 전략이다. 심지어 '소비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명품 리셀테크의 신화를 소비자에게 심어준다.

샤넬은 한국에서 9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가장 인기가 높은 클래식백이 한국에 배정되는 수량은 월 5~6개다. 공급은 한정적인데 수요가 늘면 가격이 상승한다. 하지만 명품은 가격을 한꺼번에 올리지 않는다. 소비자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점에서 가격정책을 편다. 대신 '샤넬은 오늘이 가장 싸다'며 꾸준히 가격이 오를 것이란 메시지만 계속된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결혼 때 600만원을 주고 산 샤넬 백이 지금은 1300만원이 넘었다"면서 "그동안 해온 여러 가지 재테크 중엔 샤테크(샤넬 재테크)의 수익률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부' 과시 용인하는 문화

한국과 미국 회원권 골프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미국 멤버십 골프장은 비회원을 초청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회원끼리 골프를 치는 장소다. 반면 한국은 회원이 비회원을 초대해 보여주고 '접대'하는 목적이 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최고 멤버십 골프장인 LA컨트리클럽과 대중제 랜초 파크 골프코스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일반 골퍼는 LA컨트리클럽의 존재조차 알기 힘들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골프장 사진을 올리는 행위가 엄격히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최고 명문 골프장에서 사진을 찍으며 플렉스(Flex·자신의 성공이나 부를 뽐낸다는 뜻)하는 문화가 용인된다. 명품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명품시장의 폭발적 성장 배경에는 SNS에 자신이 산 명품을 자랑하는 플렉스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어디 사세요'를 묻지 않고도 그 사람의 부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 시계와 주얼리가 활용된다.

이웃나라 일본과도 다른 점이다. 일본의 백화점 명품 매장은 화려하지 않고 크지도 않다. 일본 명품 소비자들은 주위 시선을 의식해 퍼스널쇼퍼들이 고객의 집으로 물건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서베이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의 22%만이 상대방이 부를 과시하는 것이 싫다고 답했다. 일본 45%, 중국 38%에 비해 현저히 낮은 비율이다.

한국인, 왜 명품을 좋아하나

코로나 기간 명품 매출은 연간 30~40%씩 성장세를 거듭했다. 해외여행을 못 하면서 소비자의 명품 구매가 국내로 집중됐기 때문이다. 유통업계 명품담당 B씨는 "한국은 샤넬 매출 국가별 순위에서 7위 정도이지만 국적으로는 한국인이 3위"라고 말했다.

그동안 해외에서 샤넬을 사는 한국인이 많았고 코로나 기간 해외 수요의 일부분을 국내 시장에서 흡수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코인투자와 부동산 자산 상승으로 구매력이 뒷받침됐다.

한국인의 명품 사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한국 소비자들은 까다롭고 트렌드에 민감하다. 명품업체들도 한국 소비자의 럭셔리 제품에 대한 '취향'을 존중할 정도다. 결국 명품이 추구하는 상품 '철학'이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 소비와 맞아떨어졌다는 평가다.

유통업계 명품담당 C씨는 "한국 소비자들은 명품의 전통과 스토리텔링에 매력을 느끼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명품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즐기며 명품의 장인정신에 가치를 부여한다. '희소성'을 근간으로 하는 럭셔리 제품의 브랜드 철학에 대한 이해도 역시 높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치열한 경쟁문화에서 원인을 찾는 분석도 나왔다. 명품업계 관계자 D씨는 "한국 소비자들의 경쟁심리가 어마어마하다. VIP 소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이를 과시하기 위한 심리적 요인이 명품소비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예술계와 손잡는 명품

최근 명품업체들은 자신의 상품을 '예술'의 반열에 놓고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 오랜 역사가 주는 전통과 스토리텔링, 장인정신과 희소성으로 예술품과 같은 가치를 인정받으려 한다. 한국 시장에서도 국내 작가들과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한국 소비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명품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란 평가다. 루이비통은 지난해 박서보 화백과 손잡고 '아티카퓌신(ArtyCapucines)'을 선보였다. 에르메스는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통해 한국 미술계를 지원하고 있다. 장영혜, 박이소, 서도호 등 기성 작가뿐 아니라 차세대 작가들도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 것 명품화 작업 필요

유통업계 명품담당 관계자들은 이제는 우리 것, 우리가 가진 것을 명품화할 브랜드를 키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다양한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그들만의 판타지를 만들어 국내 고객의 충성도를 이끌어낸 것처럼 우리나라 브랜드들도 고유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해외 소비자들에게는 '명품' 브랜드 못지않은 '인플루언서' 역할을 하고 있다. 유통업계 명품담당 E씨는 "외국에서 보면 한국인들이 가장 옷을 잘 입고 세련됐다는 평가를 많이 한다"면서 "우리 고유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한다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 제품을 사기 위해 아침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이 일상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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