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이 장사 왕서방’쯤이면 꽤 성공한 편”…화교 이주의 역사

정대하 2023. 4. 2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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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부터 광주지역에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 화교의 삶과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지난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펴낸 <광주화교의 음식문화> 를 보면, 광주 화교의 최초 기록은 1911년 <조선총독부통계연감> 에 나오는데, 광주 화교 23명이 등록돼 있다.

배재훈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학예연구사는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한 뒤, 1949년부터 다른 도시들처럼 광주에도 중국인 피난민들이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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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조부모의 62살 생일에 모인 화교 가족 3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20세기 초반부터 광주지역에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 화교의 삶과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아주 오래된 이웃’이라는 기획 전시를 6월4일까지 ACC 아시아문화박물관 기획전시실2에서 연다. 1부 ‘화교 사회’는 ㈜광주화교협회에서 제공한 사진 자료 등을 통해 화교의 이주 역사와 생활풍속을 보여준다. 2부 ‘음식문화’편은 화교 가정의 식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3부는 화교 의례와 음식 조리과정을 가상 현실(VR)영상으로 보여준다. 이강현 전당장은 “이번 전시회가 우리 사회의 문화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한 광주 화교를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 산둥 음식 조리과정.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지난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펴낸 <광주화교의 음식문화>를 보면, 광주 화교의 최초 기록은 1911년 <조선총독부통계연감>에 나오는데, 광주 화교 23명이 등록돼 있다. 광주 화교는 대부분 인천을 통해 왔고, 90%가 중국 산둥성 출신이다. 안재연 학예연구사는 “막노동에 종사하다 채소를 재배하거나 찐빵, 호떡, 만두 등을 파는 노점을 해 돈을 모아 짜장면집, 우동집, 청요릿집을 차렸다”고 말했다.

1920년대 광주 충장로에 설립된 ‘전라남도 금융조합연합회’ 회관공사에 중국인 벽돌 노동자들이 일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인 벽돌공들 일부는 본토와 광주의 여성과 결혼한 뒤 광주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1930년대 후반 충장로를 중심으로 화흥루, 덕의루, 아서원 등의 중국 음식점이 자리를 잡았다. 포목상도 많아 “‘비단이 장사 왕서방’쯤이면 꽤 성공한 편”으로 통했다.

광주에 중국인 이민지가 증가한 것은 해방 이후다. 배재훈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학예연구사는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한 뒤, 1949년부터 다른 도시들처럼 광주에도 중국인 피난민들이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아주 오래된 이웃’이라는 기획 전시를 6월4일까지 ACC 아시아문화박물관 기획전시실2에서 연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지금은 2~5세대 후손 236명(2021년)이 거주하고 있다. 광주에서도 1970년이 중국 음식점의 전성기였다. 충장로를 중심으로 영흥식품, 영안식품 등 식품 도매점과 왕자관, 중흥루, 천흥루, 예명반점, 영발원, 제일반점 등 중국 요릿집들이 인기였다. 영안식품 후손들이 1972년에 창업한 영안반점이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음식점으로 꼽힌다. 배재훈 학예연구사는 “광주에도 1940년대 말 춘장이 보급된 뒤 195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짜장면이 소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선홍의 ‘광주100년사’에 실린 전남금융조합연합회 전경.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지금도 화교들의 생업은 요식업으로, 그들이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은 20여곳이다. 다른 분야에도 진출했다. 광주 화교들은 1970~80년대 백합주단 등의 포목점과 한의약업, 주물업에도 자리를 잡았다. 1920년대에 문을 연 ‘쌍합성’은 문을 닫았지만, 대흥주물은 지금도 가마솥 등을 생산하고 있다.

광주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토지 소유의 제한이었다. 화교들은 한국 정부가 1961년 ‘외국인토지법’을 제정해 집과 상업용 토지, 전답 등을 합산해 661㎡(200평)를 넘지 못하도록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배재훈 학예연구사는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이 풀린 것은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 6월 ‘외국인의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부터였다”고 소개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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